“请留盘石上, 垂钓将已矣。”
“우리, 이 강변에 낚시나 드리울까?”
세월을 낚는다는 건
동양 선비들의 오랜 ‘노년몽’이다.
나이 들어
여유자적하게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다.’
세월은 해 세(歲), 달 월(月)의 합자다.
1년, 혹은 사람의 한 생을 의미한다.
당시인 왕유의 시, 청계의 한 구절이다. 산시성 사람인 왕유는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음유시인이다. 서정성에서는 시대를 초월하는 자신만의 경지를 구축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필자 개인적으로는 동서양을 막론해 그의 경지에 이른 이가 드물다고 생각한다.
청계는 저(沮) 강의 지류다. 시인은 이 녹림 속에 다양한 곡절로 흐르는 청계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세속의 번잡함과 그를 관조하는 주변의 여유를 대비해 보여준다.
강은 흐르는 세월이요, 주변의 깊고 푸른 숲은 그 흐름을 담는 우주다.
세월은 동양 시의 고전적 주제다. 세나 월이나 둘 모두가 별이다.
세는 목성, 쥬피터이며, 월은 달, 문이다.
목성은 밤 하늘 가장 밝은 별이다. 밝기는 금성이 더 밝지만, 새벽에만 보인다.
밤을 밝히는 것은 목성과 달이다.
세월은 밤하늘인 셈이다.
그 옛날 밤하늘을 보고 시간의, 세월의 흐름을 알았으니 세와 월은 자연히 한 해를 의미하는 뜻으로 변했다.
본래 처음과 시작으로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이름을 짓는 게 동양의 사고다.
예컨대 시종(始終), 시작과 끝이라는 단어로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그 전 과정을 의미하는 게 동양의 언어 습관이다.
춘추(春秋)는 봄과 가을인데,
동양에서는 이 두 계절로 한 해의 시작과 끝으로
만들어지는 한 해 전체를 의미했다.
춘추는 세월과
한 해라는 의미가 같다.
낚시는 그런 세월의 강에 던져진
내 기억의 연(緣)이다.
세월의 번잡한 흐름에서 물러나
강변에서 던진 인연의 끈이다.
그래서 낚이는 것은 추억이요,
그 추억으로 자극되는,
낚는 순간의 손맛은 ‘무위(無爲)의 위(爲)’다.
본래 무위의 관조는 무관심이 아니다.
제 3자가 가슴 졸이는 극한의 사랑이다.
노자가 ‘허극’(虛極)이라 한 경지다. 극에 달해 비워지는 경지다.
그 경지는 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세월을 지내야,
세월을 낚을 수 있는 것이다.
왕유는 짧은 오언절구 청계로 이 지고지순한 경지를 무심히 짧게 노래하고 있다.
“言入黄花川,每逐青溪水。
随山将万转,趣途无百里。”
(언입황화천, 매수청계수. 수산장만전, 취도무백리)
“황화천 오면
나도 모르게
청계를 걷네.
굽이굽이 산
돌고 돌아도
멀지 않다네.”
“声喧乱石中,色静深松里。
漾漾泛菱荇,澄澄映葭苇。”
(성훤난석중, 색정심송리. 양양범능행, 청청영가위.)
“개울 돌 사이
시끄러운데,
숲 깊을수록
고요해 지네.
물 속 수초 반짝이고
강변 갈대는 빛나네.”
그리고 시상의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我心素已闲,清川澹如此。
请留盘石上,垂钓将已矣。”
(아심속이한, 청천단여차. 청류반석상, 수조장이의.)
“내 맘 여유로우니,
청계처럼 맑은데,
그대여
이 강변에서
세월이나 낚으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