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복권의 여론 형성으로 사례
같은 책에는 저우언라이가 어떻게 덩샤오핑의 복권을 위해 당 내부 여론을 형성했는지 보여준다. 또 당 내부의 미약한 움직임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당 외부의 여론을 만들어 갔는지 보여준다. 이 사례는 마치 한나라 유방이 자신의 황위를 당초 결정했던 황태자가 아니라, 다른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한나라 건국 대신들이 황태자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줘 유방의 마음을 변치 않게 했다는 중국 고사와 비슷하다.
이 사례를 알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 천이다.
천이陈毅, 중국 공산당의 공간이다. 1901년 쓰촨四川 출신으로 1919년 프랑스에서 주경야독을 한 인재다. 1921년 프랑스 중국 유학생들의 애국운동에 참여했다. 추방돼 1922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한 중국 공산당 초기 원로다. 1955년 원수 칭호를 받았고 군사위 부주석까지 지냈지만, ‘2월 역류’로 1969년 스자좡石家庄에 유배된다. 2월 역류는 중국 공산당 원로들의 문화대혁명 주세력인 린뱌오林彪를 강하게 비판한 사건을 말한다. 린뱌오는 소련과 관계가 악화되자, 이를 이용해 자신의 반대파를 전부 베이징北京에서 쫓아낸다.
그렇게 쫓겨난 천이는 1971년 1월 16일 심한 복통으로 입원한다. 그게 운명의 신호였다. 천이는 장암 판정을 받고 1년 투병하다 결국 1972년 1월 6일 숨지고 만다.
투병 당시 그는 온몸에 퍼진 암으로 고통을 당했다. 그 아들이 지켜보다 아버지의 안락사를 제안했을 정도였다. 중국 지도부에 의해 요청은 받아들 여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본 아들은 지금도 중국의 안락사 합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천이, 그는 마오쩌둥毛泽东의 오랜 전우이자 친구였다. 마오쩌둥에게 그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마오쩌둥에게 ‘2월 역류’이후 멀어졌던 옛정을 되돌리는 일이었다.
천이의 추도식은 1월 10일 열린다. 본래 마오쩌둥이 참석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추도식에는 당대 공산당 주요 간부들이 모두 참석하길 희망했으나, 당국은 천이가 아직 제재를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 참석을 희망한 많은 노 간부들 역시 천이처럼 사실상 연금 상태였다.
그런데 모든 게 마오쩌둥의 갑작스러운 한마디로 변했다. “차 준비해라, 추도식에 간다.” 이 소식은 바로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전달됐다. 정치 9단 저우언라이周恩来는 마오쩌둥 그 한마디의 무게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큰 변화가 온다.’ 저우언라이는 당장 추도식장에 전화를 했다. “주석이 간다. 맞을 준비를 해라. 그리고 참석을 희망했던 모든 이들에게 다시 참석이 허락됐다고 전해라.”
추도식의 규모는 이렇게 갑자기 커졌다. 마오쩌둥의 결심은 순간적이었다. 중국 공산당사에 따르면 당시 마오쩌둥은 겉옷 속에는 잠옷을 입고 추도회장에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갑자기 추도식 참석을 결심했고, 결심하자마자 바로 차로 추도회장을 찾았다는 의미였다. 옛 전우 천이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갑작스럽고 급격했는지는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우언라이가 큰 변화의 조짐을 느낀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당시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비록 린뱌오의 반란을 기도하다 죽었지만, 장칭江青 등 사인방의 발호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노 간부들 역시 린뱌오에 의해 지방으로 유배돼 연금 상태였다. 마오쩌둥의 천이에 대한 이 같은 감정의 변화는 잘 하면 천이 연배의 노 간부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저우언라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추도식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천이 부인 장시张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천이 동지는 정말 간부였어요. 공이 많지요.” 그리고 마오쩌둥은 옛 간부들을 회상했다. 저우언라이가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나온 것도 이 순간이었다. “덩샤오핑邓小平 동지 역시 공이 컸죠. 그의 문제는 우리 인민 내부 모순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 제2호 인물 덩샤오핑이 인민의 적에서 인민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즉시 이 말을 천이 가족들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도록 했다. 자연스럽게 지도층에 덩샤오핑 복권 가능성에 대한 여론이 조성되도록 한 것이다. 저우언라이 본인 역시 장소만 맞으면 마오쩌둥의 덩샤오핑에 대한 평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특히 린뱌오 집단 비판 장소에서 저우언라이는 “본래 덩샤오핑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었다. 그러나 린뱌오 집단이 덩샤오핑을 인민에 대항하는 모순이라고 몰아세웠다. 그것은 마오쩌둥 주석의 의견을 왜곡한 행위였다.” 자연히 듣는 장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었다고 당사는 적고 있다. 그렇게 덩샤오핑의 복권 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덩샤오핑邓小平이 린뱌오林彪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1971년 11월 5일이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장시성 새로 만들어진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 사역을 하고 있었다. 공장 회의에서 린뱌오 사건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당사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린뱌오가 죽다니 천리가 살아있구나!”
그러고 나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毛泽东에게 편지를 쓴다. 린뱌오와 천보다陈伯达 등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편지 끝머리에 덩샤오핑은 “아직 전 건강합니다. 68세지만 아직 몇 가지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사 관찰 업무 같은 것입니다. 전 아직 인민을 위해 7,8년 더 일을 할 수 있습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