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부르는 여러 이름이 있다. 친구(親舊)도 있고, 붕우(朋友)도 있다. 순 우리말론 벗이 있다. 여기서 친(親), 붕(朋), 우(友) 모두가 가까운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먼저 우리의 벗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이다. 벌거숭이 시절을 같이 보낸 이를 벗이라고 한다. 본래 사람은 겪어 봐야 알고, 말은 오래 달려 봐야 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이의 마음을 아는 게 친구다. 사실 붕우보다 친구가 이런 벗의 정서에 더 가깝다. 친 자의 본의 때문이다. 친(親)은 어려움을 겪는 이를 찾는 마음이다. 비교적 늦게 세상에 등장한다. 금문에서 친 자는 형틀에 꽂힌 사람이다. 사람 인(人)을 바늘 신(辛)이 꿰뚫고 있다. 흐르는 피가 보일 정도로 잔혹한 글자다. 그 옆에 견(見) 자가 붙었다. 고문 받는 이를 바로 옆에 ‘본다’는 뜻이 바로 친(親)인 것이다. 고문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최소한 강한 권력자의 형법에 의해 고통을 받는 자다. 그런 자는 누구도 선뜻 만나기 어렵다. 혹시라도 연루되지 않을까 두려운 탓이다. 그런데 그런 자를 선뜻 만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피를 나눈 가족이다. 또 가족과 같은 이들이다.
服务员,我可以给你一个建议吗?... Fúwùyuán,wǒ kěyǐ gěi nǐ yígè jiànyì ma?저기요, 제가 조언 하나만 해드려도 될까요? 你很漂亮,可是你为什么不笑?Nǐ hěn piàoliang,kěshì nǐ wèishénme búxiào?당신은 정말 예쁜데, 왜 안 웃으시나요? 你看起来很严重!Nǐ kànqǐlái hěn yánzhòng!보기에 정말 심각해보여요! 飞哥,你的话后果很严重!Fēigē,nǐ de huà hòuguǒ hěn yánzhòng!저기요, 그런 말은 정말 심한 말인거 아세요?! *영어에서는 잘 안 웃고 표정이 엄숙한 사람을 가르켜 ‘serious’ 라고 묘사하지만, 중국에서는 ‘serious’의 중국어 번역 뜻인 ‘严重’을 사람에게 쓰면 틀린 표현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严重’아닌 ‘严肃(yánsù)’를 써야 한다. >>맞는 문구: 你看起来很严肃! 作者:刘志刚画家:宋海东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또 무엇인가? 철학의 가장 기본적 질문이다. 두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의 철학과 신학이 시작됐다. 철학은 여전히 사람 속에 답을 찾고 신한은 그 답을 신에게 미뤘을 뿐이다. 생과 사는 그리도 어렵고 난해한 문제다. 한자의 생과 사는 답은 아니지만 그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다루는 접근법을 보여준다. 사실 문제는 답이 아니다. 오직 문제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뭐냐에 답이 달린 것이다. 한자의 생은 싹이다. 땅에 솟은 새싹이다.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하는 상형자다. 죽음은 한편의 동영상이다. 생보다는 복잡한 그림이다. 단상 위 시체를 사람이 지켜보는 모습, 임종의 순간이다. 두터운 땅을 뚫고 솟아난 새싹, 그 여린 새싹이 어이 쉬울까? 땅 속에는 뿌리가 자리 잡고 있다. 싹은 뿌리가 내린 뒤 솟아나는 것이다. 삶이 그렇다. 어찌 뿌리 없는 생이 있으랴. 그래서 생은 외롭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홀로 뿌리를 내리고 두터운 지표를 뚫어야 한다. 새는 껍질을 깨는 노력을, 동물은 자생의 순간까지 수없는 몰생(沒生)의 위험을 겪어야 한다. 삶은 결국 홀로 서는 과정이다. 외로운 일정(日程)이다. 식물의 싹이 생(生)을 대표하게 된 이유다. 삶
사랑은 복잡하다. 좋아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주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주고도 모자랄까, 넘치지는 않을까 삼가고 삼가는 게 사랑이다. 난초에 물을 주듯 넘치면 썩고 모자르면 시들까 애태우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마음만 있다고 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것을 위한 행동이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복잡하지만 원리는 하나다. ‘마음만큼 행동하라’ 사랑이 복잡한 만큼 글자도 복잡하다. 금문에서 사랑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분명한 것은 중심의 마음 심(心)이다. 위와 아래는 모두 사람이다. 사람의 움직이는 모습이다. 변화과정에서 위는 손이 됐고, 아래는 발이 됐다.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진 글자가 기(企)다. 갑골자의 기는 사람이 두 발로 일어선 모습이다. 사람 아래 두 발의 모습이 강조돼 있다. 두 발로 서는 것 사람의 모든 움직임의 시작이다. 두 발로 서야 안정될 수 있고 두 발로 서야 멀리 볼 수 있으며 두 발로 서야 나아가 걸을 수 있다. 걸어가야, 나아가야 목적지에, 목표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은 일을 일으키는 것, 일이 안정되는 것, 일이 이어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일어나면 사랑이
认识秦始皇 Rènshi Qín shǐhuáng 진시황과 아는 사이에요 长城太漂亮了!... Chángchéng tài piàoliàng le! 만리장성이 너무 예뻐요! 那你知道长城是谁修的呢? Nà nǐ zhīdào Chángchéng shì shuí xiū de ne? 그럼 만리장성을 누가 지은 건지 아나요? 秦始皇,我认识他! Qín shǐhuáng, wǒ rènshi tā! 진시황이요. 저 진시황과 아는 사이에요! 哈哈哈,那你下次见他,帮我打个招呼吧! Hā hā hā, nà nǐ xiàcì jiàn tā, bāng wǒ dǎgè zhāohū ba! 하하하, 그럼 담에 진시황을 만나면, 안부 좀 전해주세요! *‘认识’는 ‘알다, 인식하다’라는 뜻으로, 사람을 알거나 지식을 인식할 때 주로 쓰인다. 보통 ‘认识他(그를 안다)’ 등으로 실제적으로 관계가 맺어진 사람을 안다고 할 때 쓰인다. 진시황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고인이기 때문에 실제로 알수가 없어서 ‘认识’가 아닌 ‘(배워서)알다’라는 뜻인 ‘知道’를 써야 한다. >>맞는 문구: 秦始皇,我知道他! Qín shǐhuáng, wǒ zhīdào tā!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모두가 바라는 게 있다. 행복이요, 행운이다. 하지만 행복이 뭔지, 행운이 뭔지 정작 바라면서 그게 뭔지 모른다. 그러니 진정 행복이, 행운이 뭔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게 뭔지 모르니 와도 그게 뭔지 알 길이 없다. 모르니 왔다한들 붙잡을 길도 없다. 왔는지, 스쳐 지나쳤는지. 모르고 그저 바라는 게 행운이요, 행복이다. 왔는지, 갔는지 모를 행복, 행운을 한 없이 바라기만 하니 행운이 올 일이 없고 행복할 일은 더더욱 없다. 수천년 경험 속에 선인들이 남긴 진정한 행운, 행복을 얻는 비법이 있다. 비밀은 바로 행(幸)자에 있다. 갑골문 행(幸)은 상형자다. 어떤 물건을 본 딴 것이다. 진정한 행복의, 행운의 비밀을 담은 물건이다. 행 자가 본 딴 물건은 바로 수갑이다. 나무와 밧줄로 만든 고대의 수갑이다. 가운데 밧줄 부분에 손을 넣고 양쪽 막대 손잡이를 잡아 당기면 손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수갑이다. 수갑이 어떻게 행운이요, 행복일까? 학자들은 모양이 비슷한 수갑의 글자와 길하다는 뜻의 글자가 서로 혼용해 쓰인 결과라 한다.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런 혼용 덕에 행운에 대한 절묘한 철학적 가르침이 행운의 행(幸)에 깃들게 됐다. 돌이켜 보라. 행
“变”2号线 “Biàn ”2hào xiàn 2호선 지하철로 변해요 我想去前门,可是不知道怎么做地铁。... Wǒ xiǎng qù Qiánmén, kěshì bù zhīdào zěnme zuò dìtiě. 치엔먼에 가고 싶은데, 지하철을 어떻게 타야할지 모르겠어요. 我知道,你先坐13号线到西直门。 Wǒ zhīdào, nǐ xiān zuò 13hào xiàn dào Xīzhímén. 나 알아요. 먼저 13호선을 타고 시즈먼에 가서, 然后你在那变成2号线。 Ránhòu nǐ zài nà biànchéng 2hào xiàn. 2호선으로 변하면 되요. 家荣,你是魔术师吗? Jiāróng, nǐ shì móshùshī ma? 찌아롱, 마술사에요? *한국에서도 지하철을 갈아탄다고 말하듯이 중국에서도 지하철을 변경하다고 표현하지 않고 바꿔탄다고 말한다.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타다 ‘는 중국어로 ‘换乘地铁2号线’으로, ‘变成’이 아닌 ‘换乘(huànchéng)’을 써야한다. >>맞는 문구: 然后你在那换乘2号线。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혀를 바늘로 찌른 것, 그게 말이다. 그런 말을 사람이 하는 게 믿음이다. 생각은 내 것이지만 말은 내 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도 말이 돼 입 밖에 나아가지 않는 한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입 밖에 나온 말이 바뀌면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런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의미 없는 짐승의 소리다. 갑골자 언(言)은 입 위에 바늘이 있는 모습이다. 입을 바늘로 찔러 메모판 위에 고정해 놓은 듯 싶다. 마치 어느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연인의 약속, 그 약속들이 가득히 적힌 메모 조각을 핀으로 꽂아 놓은 메모판 그런 메모판처럼 입이 내뱉은 말을 핀으로 ‘콕’ 고정한 모습이 바로 바로 말씀 언(言)이다. 중국에서는 언(言)이 입에서 혀가 위로 치솟아 음을 내는 것이라 풀이도 한다. 하지만 혀 설(舌)이 이미 있어 그 설명은 좀 구차해 보인다. 설은 입의 바닥을 찾는 모습이다. 말씀 언(言)과 같이 쓰였던 음(音)의 모습을 보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음(音)은 입 구(口) 속의 점, 혀를 바늘로 찔러 고정시켰다. 한 말을 적은 메모지를 벽에 핀으로 고정한 게, 말하는 혀를 고정시켜 바꾸지 못하게 한 게 언(言)이요, 음(音)이다. 그런 말을 사람이 하는 게 믿
“变”名字 “Biàn” míngzi 이름을 변경해요 老师,你可以给我变名字吗? Lǎoshī, nǐ kěyǐ gěi wǒ biàn míngzi ma?... 선생님, 제 이름을 변경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变名字? “Biàn” míngzi? 이름을 변경하다니요? 是啊,我不喜欢我的中文名字,我要你帮我变名字。 Shì ā, wǒ bù xǐhuan wǒ de Zhōngwén míngzi, wǒ yào nǐ bāng wǒ biàn míngzi. 제 중국어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선생님이 변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我真不会变啊! Wǒ zhēn búhuì biàn ā! 이름을 어떻게 변경할 수 있겠어요! *기존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꿀 때에는 ‘바꾸다’라는 뜻의 ‘换(huàn)’을 써야 한다. ‘变’은 ‘변경하다’라는 뜻이다. >>맞는 문구: 老师,你可以给我换个名字吗?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욕망하라’ 그게 사는 게다. 그게 활(活)이다. 침 흘리는 게다. 하지만 사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 욕망만 해서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욕망만 해서는 사는 게 텅 비워진다. 욕망은 비워지는 것이다. 배고픈 것이다. 욕망하되 채우는 것 그게 바로 사는 게다. 욕망으로 비워진 속을 채우는 것 고픈 배를 채우는 것 바로 삶이다. 욕망하고 채우는 것 그게 삶이다. 잘 욕망하고 잘 채우는 것 그게 잘 사는 길이다. 욕망을 채우는 것 바로 만족이다. 만족(滿足), 만 개의 다리다. 천수관음의 손 같은 만 개의 다리다. 천수관음의 손처럼 가득 채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족(足)은 다리요, 채움이다. 족은 일찌감치 갑골자에 등장한다. 여러 모습이다. 하지만 모두 누가 봐도 다리다. 다리에서 ‘걷다’는 뜻이 나왔고, ‘채우다’는 뜻이 나왔다. 만족(滿足)이란 뜻의 족(足)은 노자에서 등장한다. 비움과 채움의 철학이 바로 노자의 철학이다. 만족의 등장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노자는 “祸莫大于不知足”(화막대우부지족) “만족을 모르는 만큼 화가 온다” 했다. 만족과 그침을 같은 뜻으로 쓴 이가 바로 노자다. 장자는 족을 부유하다는 뜻까지 확장해 썼다. 그렇게 족은 욕망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