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시안 나토 구상’은 과연 헛된 것일까? 실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국제 정세는 빙하 속 물길과 같다. 수 만년 아주 천천히 움직이지만, 한 번 그 움직임이 빙산의 일각까지 변화를 주기 시작할 때면 너무도 빨라, 아무도 그 변화에 대응하기 힘들다. 빙산의 일각이 움직이기 전에 빙하 물길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 그것만이 대응이 가능하다. 국제 정세가 빙산의 움직임과 같다. 빙산의 일각, 드러난 부분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움직임이 없는 게 아니다. 한 번 빙산의 일각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국제 정세는 누구도 걷잡을 수 없이 바뀌게 된다. 미리 준비한 이들만이 이 움직임을 활용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최근 국제 정세는 ‘급변’이 주제어다. 글로벌 사회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다. 수만 명의 생명이 수백 수천발의 폭탄 아래 오늘도 생사의 위험에 처했고, 실제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위험도가 가장 극도로 올라가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이고, 다른 한 곳이 바로 대만 해역이다. 대만의 독립움직임에 중국은 ‘무력 사용’을 공약하고 있다. “대만은 그대로 있으라!” 중국의 요구다. 하지만 중국도 안다.
‘궁즉통’(窮卽通)이란 궁한 데로 쓰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나온 방법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짧게는 변통(變通)이라고 한다. 다만 상황이 달라지면 ‘궁즉통’의 방식은 불통(不通), 즉 통하지 않는 방식이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통하면 안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여기 짧은 이야기는 임시방편의 도리를 모르면 나오는 우둔한 사례를 보여준다. 짧고 가볍지만 주는 경고는 무겁고 무겁다. 옛날 중국에 한 마을에 자린고비 양반이 살았다. 어느 날 하루 이 양반이 긴 의자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양반은 긴 의자를 만들면서 나무를 사 쓰는 게 너무 아까웠다. 옆에서 그 고민을 듣던 목수가 ‘궁즉통’ 묘안을 내놨다. “영감, 이 긴 의자를 한 쪽에만 다리를 만들고 나머지는 식당 벽에 기대어 놓고 쓰면 됩니다. 그럼 의자 다리를 만드는 나무를 아낄 수 있지요.” 이야기를 들은 양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좋은 생각이네, 그럼 빨리 만들어 주시게.” 그리고 의자가 만들어지자 양반은 목수를 칭찬하며 나무의자를 보고 감탄했다. “오 아주 좋아. 나무도 줄이고 의자도 쓰고, 아 좋네!” 그리고 얼마 뒤 양반의 집안에 행사가 열렸다. 양반은 최근 만든 의자를 자랑하고 싶어
천지만물도 마찬가지다. ‘천지’나 ‘만물’의 관계는 ‘우리’와 ‘나’, ‘나’의 관계처럼 그렇게 묘하게 이어져간다. 만물이 있어 정확히 나의 만물과 너의 만물이 있어 천지를 만든다. 부채가 존재하는 바람이 끊이지 않듯 천지가 존재하는 만물은 끊이지 않는다. 천지가 만물에 불인(不仁)한 이유다. 항상 네가 있어 우리는 ‘나’에게 불인(不仁)하며, 항상 ‘만물′’가 있어 천지는 만물에 불인한 것이다. 만물이 ‘좆밥’같고 너와 내가 ‘추구’(刍狗) 같다. 하지만 만물없는 천지가 없고 너와 내가 없는 우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귀하지 않은 만물이 있고, 어찌 귀하지 않은 나와 내가 있을까? 천지만물은 이런 균형 속에 산다. 그래서 오래가는 것이다. 끝없이 나를 또 다른 나로 치환해 가는 것 천지가 장구한 도리요, ‘우리’의 장생지도다. 우리는 탄생을 통해 장생(長生)을 하는 것이지, 나와 나의 생에 머물며 장생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 하는 것은 너와 나에만 갇힌 탓이다. 있음 유(有)에만 머문 탓이다. 우리의 삶속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이 새로운 탄생으로 면면히 이어짐을 보라! 충일과 만족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노자는 “天长地久;
‘나’와 ‘너’가 있어 ‘우리’다. 내가 없어도 네가 없어도 우리는 없다. 하지만 ‘너’는 또 하나의 ‘나’다. 또 하나의 나에게 나는 ‘너’가 된다. 우리 속에서 너는 또 하나의 ‘나’이며 나는 또 하나의 ‘너’다. 자연히 우리 속에서 언제든 나는 또 하나의 나로 치환될 수 있 언제든 너는 또 하나의 너로 치환될 수 있다. 우리 속에 나와 너는 없으면 안되는 귀하고 귀한 존재이면서 우리 속에 나나 너나 언제든 서로 치환되는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 속에 나와 너, 또 하나의 너와 나의 관계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후, 미국 무역대표부(Office of US Trade Representative)는 매년 미 의회에 중국의 WTO 약속 준수 여부를 조사해 보고하고 있다. 올 2024년 보고서 준비를 위해 미 무역대표부는 지난 9월 24일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에서는 중국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더 '더 전문적', '약탈적' 무역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의 약탈적 무역 정책을 억제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강력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중 ‘무역전’의 전운이 다시 짙어지고 있다. 과연 미국은 중국을 억제하기 위한 새로운 조치에 나설 것인가? 글로벌 경제가 갈림길에 서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의 청문회는 중국의 IT 첨단 상업제품에 대한 개방과 지식재산권의 보호 정도를 살펴보는 자리였다. 미국 무역대표부 중국, 몽골, 대만 담당 부대표 테리 맥카튼(Terry McCarten)의 청문회 개막식 발언은 미국의 생각을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준다. “중국은 오랫동안 기존 WTO 규정을 위반하고, 무시하고, 회피해 왔다. 심지어 WTO의 감독 및 책임 메커니즘을 훼손하려 했다. 최근 몇 년간 중
허례와 허식 그리고 실속은 그릇과 음식의 관계와 같다. 그릇이 예쁘고 아름답다고 음식이 나쁘면, 나쁜 것이듯 겉치레가 아무리 화려해도 실속이 없으면 나쁜 것이 된다. 옛날 중국에 한 자린고비 양반이 있었다. 이 양반은 지역에서 가장 예쁘고 훌륭한 잔치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릇에는 매 그릇마다 담을 음식들이 채색된 그림으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림들이 얼마나 생생한지 마치 실제 음식처럼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이 자린고비 양반은 매번 이 잔치 때마다 이 그릇을 이용해 득을 봤다. 사실 그 득이란 게 별개 아니다. 잔치를 하면서 그릇만 내놓고 실제 음식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하루는 한 손님에 물었다. “아니 어찌 음식이 없습니까? 뭘 먹어야 하나요?” 그러자 자린고비 양반이 답했다. “아니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지 않소. 보기 좋은 음식이 그득한 데 보기만 해도 배부른 게 아니요. ㅎㅎ” 어이 없어 하는 손님을 뒤로하고 자린고비 영감이 웃으며 돌아섰다.
“春风不相识, 何事入罗帏?” (춘풍부상식, 하사입라위) 어디선가 불어온 봄바람 애꿎은 치마 끝만 들추네. 시성 이백(701~762)의 춘사다. 이백은 누구라 말할 것 없는 천재 시인이다. 1300여년 전 당나라 시인이지만, 지금 읽어도 시의와 시정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적시고, 요동치게 한다. 그의 시어(詩語)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 속에 있지만, 그의 시율은 시대를 넘어 천고를 관통해 면면히 이어진다. 동서양, 그의 시처럼 때론 호방하고 때론 애처롭고 때론 정욕에 싸인 듯 때론 백합처럼 간결하고, 깨끗한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시를 본 적이 없다. 춘사(春思)는 말 그대로 ‘봄의 생각’이다. 봄에 드는 그리움이다. 하지만 겨우내 가슴 속 깊숙이 농 익어온 마음의 정, 심정(心情)이다. 본래 그리움이 짙어지면 애달프다. 애달프다는 건 마음만 아픈 게 아니다. 몸도 아픈 것이다. 몸과 마음으로 그리고 그려, 그리다 못해 그대 오는 날 그만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는 단장(斷腸)의 고통, 애달픔이다. 춘사는 이 애달픔을 너무 간결하게 너무도 새침하게 너무도 요염하게 그렸다. 그래서 일견 소녀의 방심(芳心)같고 탕부의 음심(淫心)같으며, 때론 열부(烈婦)의 결의(
우리는 많은 경우 계산을 했는데, 어리석은 답을 얻곤 한다. 삶의 계산은 일차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면의 고른 고려가 더해져야 하는데, 보통의 경우 우린 하나만 알고 계산을 한다. 자연히 항상 어리석은 결론이 나온다. 옛날 중국에 돈만 많은 어리석은 노인이 있었다. 돈을 쌓아두고, 그 많은 농사와 밭을 혼자서 했다. 친구들이 조언하길; “여보게 노비를 고용하시게 그러면 더 많은 농사를 짓고, 밭을 할 것 아닌가? 자네는 쉴수도 있고.” 했다. 하지만 이 노인이 답하길; “아니 고용을 하면 일하는지 하지 않는지 감독을 해야지. 그러면서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숙소도 마련해줘야 할 것 아닌가. 수지가 맞지를 않아. 수지가...” 그 말을 들은 한 젊은이가 노인을 골려 주려 제안을 했다. “그럼 노인장, 우리 집에 어려서 도사의 술법을 얻어 밥을 먹지 않고 일만 잘하는 농노가 있는데, 데려다 쓰면 어떠시오? 내 노인장이 원하면 빌려 주리다.” 자리고비 노인이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그럼 밥을 안 먹고 어찌 산다는 말이요.” 젊은이가 답하길; “어려서 도인에게 도술을 배워 바람을 먹고 방귀만 뀐다오.” 그러자 노인이 한 참 생각을 한 뒤 답했다. “아
‘취해 잊은 시간 너도 나도 웃고‘ “我醉君复乐,陶然共忘机。”(아취군복락, 도연공망기) “취한 그대에 건넨 한 잔 그댄 환희 웃고 우린 어느새 시간마저 잊었다네.” 시성 이백(李白:701~762)의 시다. 가장 흥했던 당이 망조가 들기 시작한 시기의 인물이다. 한문학의 영향을 받은 동양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시인이다. 일찍이 중국 천하를 유람하며 곳곳에 명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쉽고 간결하며 호방하면서도 때론 간절하다 못해 애절한 시구를 남겼다. 한 수 한 수가 사람의 심결을 따라 스며든다. 소개한 시는 ‘下终南山过斛斯山人宿置酒’(하종남산과곡사산인숙치주)다. 제목 그대로 ‘종남산 아래를 지나다 은거해 사는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다’는 내용이다. 석양 산길을 지나 친구를 만나는 묘한 기대가 풍경 묘사에 담겼다. 그리고 만난 친구와 나눈 주담(酒談) 낙엽 소리에도 웃는 소녀만 같다. 이제 시의(詩意)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긴 여름밤이다. 산기슭 친구를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눌까, 길을 나선다. 능선에 오르니 해가 진다. 길어지던 나뭇가지 그림자 어느새 달 빛 그림자로 바뀌어 간다. 발걸음 총총 재촉하니, 달빛도 졸졸 따라온다. 어느만큼 왔나, 돌아보니,
뱃속의 똥을 보라. 살았느냐? 똥을 쌌다는 의미다. 먹으면 반드시 싸게 돼 있다. 우리는 그 것을 살았다, 살아 있다 한다. 살아 있다는 것 바로 ‘생’(生)이요, 생은 먹고 쌌다는 변화의 연속이다. 먹는다는 게 무엇인가? 빈 배를 채운다는 게다. 빈 배가 무엇이던가? 우리 속의 빈 곳이다. 우리 겉보다 길고 어두운 빈 곳이다. 그 빈 곳은 살아 있는 한 끝없이 채워져야 한다. 또 비워져야 한다. 채워지고 비워지는 곳 바로 우리 뱃속이다. 우리 뱃속은 너와 네가 살아 있는 한 음식이 들어오고, 찌꺼기, 똥이 돼 나오는 곳이다. 입이 입구요, 항문이 출구다. 생명의 출구도 있다. 정자가 들어가 새 생명이 돼 나오는 곳, 바로 ‘현빈의 문’(玄牝之門)이다. 항문에서 나오는 건 배설, 똥이요, 현빈의 문에서 나오는 건 탄생이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의 빈 곳. 끝없이 무엇인가 들어와 무엇인가로 변해 나가는 곳, 우리의 빈 곳, 뱃속이며 우주다. 그 속 현빈의 문에서 나오는 게 ‘상생’(相生)이요, ‘탄생’(誕生)이다. 면면히 끝없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 “면면약존 용지불근”(绵绵若存,用之不勤) “끝없이 존재하며, 힘을 쓸요가 없다.” 다 개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