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 72개(72만㎡)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중국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이 올해로 603살이 됐다. 베이징 한복판에 자리한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 집권기에 20만 명이 넘는 인력으로 15년에 걸쳐 공사를 진행해 1420년에 완성됐다. 명청 왕조 시기 9999개 방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현재 많은 건물이 소실됐지만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중국인들에겐 생전에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힌다. 매년 춘제(春節, 설) 연휴가 되면 방문객 신기록을 갱신하는 자금성이 처음 대중에게 개방된 날은 언제였을까? 지난 1925년 10월 10일로 황제의 거처에서 국민들을 위한 고궁박물관으로 변신을 한다. 중화민국 정부가 자금성을 고궁박물원으로 개칭하고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자금성이 처음 시민에게 개방된 날은 황제의 거처를 보러 몰려든 사람으로 말 그대로 장사진을 이뤘다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첫 개방은 오후 2시쯤 이뤄졌다. 사람들은 당일 오전 8시부터 이미 줄을 서기 시작해 신무문 앞까지 이어졌다. 베이징에 자동차가 드물었던 시절이지만, 차를 몰고
1965년 11월 중국 전역을 10여 년 휩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타오른다. 신중국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자기파괴의 불길은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가 아니라 저 멀리 상하이에서 시작됐다. 상하이에서의 이 같은 움직임을 류샤오치(刘少奇)나 저우언라이(周恩来) 등 당대 중난하이 지도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중난하이와 먼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도자들이 정신없이 바빴다.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나라살림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천이(陈毅) 등 당대 중국 지도자들은 모든 역량을 경제 회복에 집중했다. 자연히 나라살림을 책임진 총리 저우언라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바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가뭄 등 자연재해가 지속돼 저우언라이를 괴롭혔다. 전국 주요 피해지역의 가뭄대책 현황을 점검하느라 아예 베이징을 비우는 날이 더 많았다. 농촌일이 마음에 걸려 자리를 비우니,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펑전에게 내게 전화를 하도록 하시오, 그럼 내 언제든 다시 베이징으로 달려오겠소. 당시 저우언라이가 류샤오치 등 당 중앙 지도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중국의 비밀을 감춘 곳, 바로 중난하이(中南海)다. 그 중난하이 풍운의 역사가 바로 신중국의 역사다. 중국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 바로 중난하이(中南海)다. 남쪽 바다 한가운데라니? 구중심처보다 더 은밀한 맛이 있다. 중난하이는 사실 중해와 남해를 함께 부르는 명칭이다. 베이징 자금성 서쪽에 인공으로 만든 큰 호수 두 곳이 바로 중해와 남해다. 과거 명청시대 때부터 황제의 쉼터, 귀족과 고관대작들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그만큼 경치도 아름답다. 청나라가 망한 뒤 중화민국 정부가 1925년 10월 10일 자금성을 고궁박물관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키로 하면서 중난하이는 자금성을 대신해 중국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그 순간, 중난하이의 평지풍파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각 지역 정치 세력은 물론이고, 외세 일본까지 참여한 소위 '중난하이 왕좌의 게임'이 벌어진 것이다. 마오쩌둥(毛泽东)의 공산당은 지방 군벌이 득세하면서 정치 중심의 지위가 흔들린다. 하지만 그도 잠시일 뿐. 공산당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중난하이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베이징이 공산당 천하 중국의 수도가 됐고,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건국공신들은 중난하이에 살기 시작했다. 역시 피할
"排场 [páichang]" 우리 말로 '웅장한 장면', '겉보기', '겉치레' 등으로 번역된다. 중국을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단어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리 좋은 뜻으로 들리지 않는 단어다. 우리가 지나치게 '실사구시'实事求是의 '실'实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허虚와 실实에서 허를 버리고 실 만을 옳다 보는 것은 어떤 점에선 큰 오류다. 허와 실은 서로 보충하는 것이지, 상반된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는 멀리 있는 이익, 즉 '명리'名利고, 실은 눈앞에 이익, 즉 '실익'实利이다. 명리만 쫓으면 실속이 없고, 실익만 쫓으면 큰 이익을 놓치게 된다. 본래 허를 얻으면 실이 절로 오고, 실을 얻으면 허가 뒤따르게 된다. 이 이치를 일찍이 중시한 게 중국의 문화다. 군자는 항상 둘을 모두 추구한다. 아니 둘의 균형을 추구한다. 그게 중용의 이치다. 특히 일정 수준, 소위 "이만하면 먹고 살 걱정이 없다" 싶으면 추구하게 되는 게 실보다는 허, 명리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도 대기업 반열에 들면, 그 이름만으로 어떤 사업을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이름을 걸고 너무 작은 이익을 추구하면 오히려 해가 되는 이치다. 이런 의미에서 예
요즘도 중국어는 구어와 문어가 차이가 크지만, 과거 중국에서는 구어와 문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였다. 표의문자의 특성 때문이다. 쉽게 말해 말한다고 글을 쓰지 못했고, 써 놓은 글을 소리내 읽었다고 그 뜻을 일반 백성들이 알지 못했다. 글을 쓰는 수많은 법칙이 있었고, 그 법칙을 두루 달통하는 데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쉬운 예를 과거 시험도 마찬가지다. 4자, 4자로 대구를 이루는 문형을 써야 했다. 붓을 들고 쓸 때도 예서와 행서를 정해 놓고 쓰도록 했다. 그냥 논하는 글을 쓰기도 쉽지 않은 데 문형 규칙까지 지켜야 했으니, 오늘날의 대입 논술의 어려움은 과거 과거시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싶다. 굳이 과거시험 문장은 말하지 않더라도 지방 행정 관서의 모든 문서가 이렇게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언어로 작성됐던 것이다. 시골에서 웬만큼 글을 배워서는 지역 관공서 일을 보기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차이가 컸던 게 문어와 구어다. 그나마 이렇게 큰 차이가 났던 게 좁혀진 게 청나라 말기 일어난 구어 문체 운동, 백화문 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럼 백화문 운동은 언제 일어났을까? 중국 지식인들은 백화문 운동의 시조를 후스(胡适,1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