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국시대는 모략의 시대다. 적국과 정적을 해하기 위한 각종 모략이 판쳤다. 읽다보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다. 진나라의 천하통일 기틀을 다졌던 장의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장의가 정적을 제거하려고 모략을 썼다. 정적의 이름은 서리질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장의는 서리질의 직위를 높여 초나라 사신으로 가도록 돕는다. 그리고 초나라 왕에게 서리질을 진나라 재상이 되도록 지원하도록 했다. 초나라에서 왕이 성대한 잔치를 벌여 서리질을 접대하고, 진나라 미래의 재상이라 치켜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진나라에 머물던 초나라 외교관들은 일제히 서리질이 재상감이라고 진나라 왕에게 알렸다. 하지만 모든 게 장의의 술수였다. 장의는 초나라 사신들이 나서기 전에 진나라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리질이란 자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초나라 사신으로 간 자입니다. 그것은 국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자가 초나라에 있어서인지 초왕에게 자기를 후견인으로 삼고, 진나라의 재상 자리를 탐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재상이 되면 진나라를 섬기겠습니까? 초나라를 섬기겠습니까?" 진나라 왕은 대노했고, 서리질이 오기만 하면 문책을 하려고 했다. 진나라에 머물던 초나라 사신을 통해 이 사실
我昔未生时,冥冥无所知。 wǒ xī wèi shēng shí ,míng míng wú suǒ zhī 。 天公强生我,生我复何为? tiān gōng qiáng shēng wǒ ,shēng wǒ fù hé wéi ? 无衣使我寒,无食使我饥。 wú yī shǐ wǒ hán ,wú shí shǐ wǒ jī 。 还你天公我,还我未生时。 hái nǐ tiān gōng wǒ ,hái wǒ wèi shēng shí 。 나 아직 태어나기 전 그 때,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몰랐네 하늘이 나를 태어나게 했지, 하늘은 도대체 왜 나를 낳았을까? 옷이 없어 추위에 떨고, 음식도 없어 배만 주리는데 하늘이시여! 나를 돌려줄테니 태어나기 전 그 때로 돌아가게 해주길.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활동한 왕범지(王梵志, 590~660 추정)의 시다. 짧고 간결한 문장이다. 간단히 사는 게 힘든데, 도대체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고고함을 추구하는 시인들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요즘 말하는 구어체로 쓰인 시다. 그래서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하는 맛은 없다. 그러나 순수하게 삶의 어려움과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을 써내려간 게 느껴진다. 가다듬은 감성에서 나오는 절제된 울림은 한시의 기본
중심(中心)은 가운데 마음이다. 사전에 중심(中心)은 가운데요, 중심(重心)은 무게의 가운데라 했다. 사실 중심(中心)이나 중심(重心)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실제 찍히는 점(点)이 다를 수 있다. 평균과 중간이 다른 이치다. 길이의 중심(中心)과 무게의 중심(重心)은 개념상 비슷하지만 실제 점(占), 점한 곳이 다른 경우가 많다. 길이의 중심(中心)은 그 길이의 반이 중간이다. 하지만 무게의 중심(重心)은 길이의 반이 반드시 그 중심(重心)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중심(中心)은 길이의 중심(中心)과 무게의 중심(重心)이 더해진 개념이어야 한다. 진정한 마음의 중심(中心)이 바로 충(忠)이다. 충은 마음의 중심 그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복잡한 개념 탓에 한자 충(忠)은 갑골자가 아니라 금문에서 나온다. 마음에 가운데 중심(中心)이 선 모습이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게 바로 충(忠)인 것이다. 그래서 치우쳐 편협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마음 씀씀이를 다하는 것, 그게 충(忠)의 본의(本意)다. 중세 봉건왕조가 충(忠)의 대상을 군주(君主)로, 상급자로 고착시키면서 뜻이 변했지만, 본래 충(忠)이란 스스로를 가꾸려는, 즉 수양(修養)하는 개인이 사
사람을 볼까? 자리를 볼까? 성인(成人)의 만남, 사회 교류는 자리를 통해 이뤄진다. 자리에 앉은 이를 찾아 만나고 자리에 앉아 찾아온 이들을 만난다. 자리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건 사무실 안 책상 하나 의자 하나다. 그 옛날엔 그저 바닥 위의 두터운 방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그 의자 뒤 그 방석 위에 따르는 권한과 의무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보는 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권한과 의무다. 아니 권한이다. 사람이 자리를, 자리의 앉은 이를 찾는 건 그 권한 때문이다. 의자가 그냥 의자가 아니요. 방석이 그냥 방석이 아니게 되는 이유다. 자리가 그냥 방석이 아닌 이유다. 그런 방석에서 사람과 사람이 마주 한 것이 바로 자리에 앉는 것이다. 한자 좌(坐)의 변천은 이 같은 세속의 도리(道理)를 전한다. 본래 갑골자 시대 앉는다는 것은 그저 순수하게 방석에 앉는 것이었다. 나라의 틀이 잡히고 권한과 의무가 생기며 앉을 좌(坐)는 동등한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꼴이 됐다. 사실 자리를 보고 사람을 만나는 건 속세의 상리요, 도리다. 속세를 사는 한 군자나 소인이나 다름이 없다. 차이는 만나고 나서 비로소 생긴다. 소인은 자리만 보고 군자는
전국시대 진나라가 천하 패권의 토대를 닦은 것은 촉나라를 합병한 뒤다. 만사가 그렇듯 키우기 위해서는 틀부터 키워야 하는 법이다. 당시 진나라의 군세는 이미 천하의 각 제후국을 압도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진나라는 천하를 갖기에는 아직도 미흡했다. 두 나라의 연합군을 상대하기 벅찼다. 즉 진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병합하려 하면 이웃나라와 힘을 합쳐 대항하면 됐다. 진나라 때문에 이웃나라끼리 힘을 합치는 외교가 빈번했다. 진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보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가 필요했다. 진나라 혜문왕 때의 일이다. 혜문왕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26대 국군(國君)이자 초대왕이다. 당시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위해 당시 진나라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한(韓)나라를 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촉(蜀)을 치는 것이었다. 한나라는 크고, 촉은 작고 힘은 없지만 토산물이 많은 곳이었다. 전자는 장의가 주장했고, 후자는 사마착이 주장했다. 혜문왕 앞에서 둘이 각자의 주장을 폈다. 먼저 장의가 말했다. "우리가 먼저 위, 초 두 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고 군사를 보내, 한나라의 환원산과 구씨산의 요새가 고립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나라 둔류의 길을 막
“丢”了男朋友 “Diū ”le nánpéngyou 남자친구를 잃어버렸어요. 马丽丽好像今天不高兴。 Mǎ Lìli hǎoxiàng jīntiān bù gāoxìng. 오늘 마릴린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是啊,她怎么了? Shìa ,tā zěnmele ? 그러게요, 무슨 일이래요? 我知道! Wǒ zhīdào ! 내가 알아요! 听说她丢了她的男朋友! Tīngshuō tā diū le tā de nánpéngyou ! 남자친구를 잃어버렸대요! *영어의 ‘lost’은 ‘잃어버리다’라는 뜻도 있고 그를 ‘차버렸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이다. ‘차버렸다’는 중국어로 “踹、甩”이다. 맞는 문구: 听说她甩了她的男朋友! Tīngshuō tā shuǎi le tāde nánpéngyou!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농사를 짓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돌을 고르는 일이고 건물을 짓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돌 고른 땅을 다지는 일이다. 세상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이 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초요, 기본이다. 삶과 인생의 공리다. “모든 일이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이 있고서야 비로소 끝이 있다. 모든 일이 본이 있고, 본이 있고서야 비로소 말이 있다.” 대학의 도리다. 자연의 순리다. 땅이 고르고 단단해야 그 위에 무엇이든 지을 수 있다. 심지어 어느 나무도 터를 잡지 않고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인간의 삶은 더욱 그렇다. 삶의 터를 잡아야 삶이 편해지는 것이다. 삶의 터는 어떻게 내리는가? 한자 기(基)가 그림으로 그 방식을 전한다. 땅 위를 돌을 쌓아 만든 틀로 내려치는 것이다. 때리고 때려, 다지고 다져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삶의 기초도 마찬가지다. 기본 틀을 되풀이 해 익히고 익히는 것이다. 다지고 다져 능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면 익혀야 한다. 그 배움이 다져지고, 익숙해져 기초가 될 때 비로서 삶이 편해진다. 바로 알면 실행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경지다.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
舍南舍北皆春水, 但见群鸥日日来。 shě nán shě běi jiē chūn shuǐ, dàn jiàn qún ōu rì rì lái 。 花径不曾缘客扫, 蓬门今始为君开。 huā jìng bú céng yuán kè sǎo, péng mén jīn shǐ wéi jun1 kāi 。 盘飧市远无兼味, 樽酒家贫只旧醅。 pán sūn shì yuǎn wú jiān wèi, zūn jiǔ jiā pín zhī jiù pēi 。 肯与邻翁相对饮, 隔篱呼取尽余杯。 kěn yǔ lín wēng xiàng duì yǐn , gé lí hū qǔ jìn yú bēi 。 초당 주변으로 온통 봄기운 가득하고, 갈매기들은 날마다 날아오네 꽃잎 떨어진 길 그대로 두고, 싸리문 활짝 열어 오는 그대를 기다리네 장터가 멀어 가지 못해 초라한 안주,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술은 오래 묵은 탁주뿐 그대만 좋다면 이웃의 말솜씨 좋은 영감 불러내 남은 술 함께 마시세 말년 행복이라는 게 뭘까?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조용한 서재에서 책을 읽고 산책하는 게 일상인 생활은 어떨까? 가끔, 산해진미는 아니어도, 탁주에 푸성귀가 전부라 해도 이웃, 친구와 왁자지껄 즐거운 술상을 함께 할 수 있다
기쁘고 슬프고 모두가 실은 하나다. 정(情)이다. 정 하나의 서로 다른 양 끝이다. 관계가 있고서야 정도 쌓이고 정이 쌓여야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것이다. 만남의 시작은 본래 고기 한 점이다. 같이 나누는 고기 한 점, 같이 먹은 한 상 차림 바로 모든 관심의 시작이요, 관계의 시작이다. 정(情)의 시작이다. 정은 마음이 항상 푸른 것이다. 관심이 생기고서야 상대방이 내 마음 속에서 항상 푸른 것이다. 갑골자, 아주 오랜 사람의 글자 속에 보이는 사귈 제(祭)의 의미다. 발이 있는 귀한 그릇 위로 고기 한 점을 얻는 손의 모습이다. 사귄다는 건 상대방의 숟갈에 얹는 고기 한 점이었던 것이다. 이를 죽은 이에게 하면 제사(祭祀)가 되고, 산 이끼리 하면 축제(祝祭)가 된다. 너와 나의 사귐은 하나의 경계를 넘는 교제(交際)가 된다. 여기 제(際)에는 경계를 의미하는 부호가 담겼다. 사귐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서로 나눈 고기 한 점, 귀한 식사 한 번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본다. 쉽게 아우라의 빛에 취한다. 진품이 내는 게 아우라지만, 사람들은 진품의 진위를 가리지 못한다. 그저 아우라만 볼뿐이다. 그게 사람이다. 사실 보이지 않고, 보여주지도 않고, 보라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다. 다만 현명한 사람, 현인은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한다. 보여주지 않는 것은 더욱 더 노력해서 본다. 감추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초나라 재상 소해휼(昭奚恤)에 대한 이야기다. 어찌나 능력이 뛰어난지 다른 나라의 모두가 이 소해휼을 두려워했다. 초나라 왕이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때 한 사람이 나서 동화를 들려준다. 그 유명한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고사다. “옛날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숲에서 여우를 만났습니다. 그 여우가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내가 백수의 왕이야. 하느님이 그리 정했지. 힘만 세고 무식한 네가 알 일이 없지.’ 말을 들은 호랑이가 어이가 없어 말했습니다. ‘거짓말이면 잡아먹겠다.’ 여우 역시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앞장서 걸어갈 터이니, 네가 따라오면서 잘 봐둬. 다른 동물들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