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 조직의 내부 비리를 발본색원할 수 있는 고발함은 누가 언제 발명했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한나라 때 발명됐다는 게 인정받는 설 중 하나다. 서한의 조광한(趙廣漢)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략 기원전 74년이다. 당시 지역 토호와 중앙 귀족이 손을 잡고 지역 행정을 농단하자, 조광한이 이를 개혁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부 비리 척결에는 고발이 최고였던 셈이다. 그럼 조광한은 어떤 인물인가? 조광한은 한나라 선제(宣帝)를 옹립하는 일에 참여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진 뒤 선제 때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돼 강호(强豪) 원씨(原氏)와 저씨(褚氏) 등을 주살(誅殺)했다. 본시(本始) 2년(기원전 72) 조충국(趙充國) 등 5장군(將軍)을 따라 흉노(匈奴)를 격파했다. 다시 경조윤에 올랐는데,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여 법을 집행할 때 권귀(權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적도 많았다. 결국 나중에 일 때문에 정위사직(廷尉司直) 소망지(蕭望之)의 탄핵을 받아 요참(腰斬)을 당했다. 고발함은 그가 평원 원년(기원전 74년) 영천태수가 됐을 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영천 지역에는 토호들이 중앙 귀족과 결탁해 온갖 이
"국방부 긴급 전화입니다.” 1966년 12월 중순 저우언라이(周恩来)의 사무실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비서가 뛰어 들어와 보고를 한다. “국방부라니?” 놀란 저우언라이가 전화를 집는다. “지금 홍위병들이 국방부 건물로 쳐들어간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전화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가 긴급히 비서를 불렀다. “빨리 중앙문혁소조를 연결해!” 1966년 10월과 11월은 문화혁명의 주요 분수령이다. 장칭(江青)은 11월 초순 상하이에서 린뱌오(林彪) 등과 협력해 기존 상하이시 당위원회를 완전히 뒤집어엎는데 성공한다. 9일에는 상하이에 왕훙원(王洪文) 등을 수뇌로 하는 상하이혁명조반총사령부가 성립된다. 마오쩌둥(毛泽东)의 후계자로까지 성장하는 왕훙원이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을 하는 것이다. 소위 문혁 사인방이 이때부터 형성된다. 왕훙원 등 사령부 대표들은 10일에는 베이징에 관련 보고를 하겠다고 기차를 탈취해 북상을 시도하다 혁명적 행동임을 인정받기로 하고 되돌아간다. 이제 상하이는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 손에 떨어진 것이다. 문혁 사인방의 조정을 받은 홍위병의 공격 대상은 이뿐이 아니었다. 진정한 목표는 베이징이었다. 그것도 총칼로 무장한 군대를 관리
2022년 기준으로 중국 고속철도의 길이는 총 4만㎞가 넘는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거리다. 중국 철도 당국은 이를 2035년까지 7만㎞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을 '고속철의 왕국'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이라는 것도 단순히 보면, 중국과 유럽을 철도로 연결하자는 것이다. 이런 중국 철도의 시작은 어땠을까? 세계에서 가장 짧았다면 믿을 이가 몇이나 될까? 중국의 첫 철도는 운행 구간이 매우 짧았다. 중국 자료에 따르면 중국 첫 철도는 1865년 베이징 선무문 인근에 설치됐다. 그런데 길이가 불과 500m였다. 버스 한 정거장 거리 정도였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며칠 뒤 바로 철거가 됐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볼 때 중국은 철도가 필수적인 나라였다. 국토가 넓기도 했지만, 사람이 많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기에 철도만큼 적절한 수단이 없었다.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거대한 철도 시장이 나타나자 열강들은 서로 먼저 청나라의 철도 산업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웬걸? 청나라 관료들은 철도에 조금
1966월 12월 24일 중국 베이징 체육관에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68세의 한 노인이 초초한 듯 시간을 본다. 군중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세계의 절반이 크리스마스 이브 분위기에 젖어 있을 무렵이다. 중국 베이징 체육관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화혁명 사인방의 발호는 갈수록 심해졌다. 장칭(江青) 등 사인방은 당 중앙의 주요 간부들을 겨냥했다.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하나씩 제거해갔다. 사인방의 총과 칼은 당중앙 중난하이(中南海) 밖에 있는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이었다. 사인방은 외부 홍위병을 독려해 말썽을 일으키고, 그것을 문제삼아 당중앙 간부들을 낙마시켰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마오쩌둥(毛泽东)이 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는 그의 생애 가장 혹독한 10년을 겪게 된다. 그는 어떻게든 장칭 등이 제거하려 목표로 삼은 당간부들을 보호하려 했다. 사실 그게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모든 간부가 낙마를 하면 결국 저우언라이 자신도 낙마할 것이 뼌했다. 그렇다고 저우언라이 자신이 낙마하면서 남을 보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 역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장칭
‘온고지신(溫古知新)’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 공자의 말이다. 논어 위정 편에 나온다. 정말 많은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공자왈 맹자왈? 중국의 식품 위생 관리의 연원을 논하기 위해서다. 요즘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중국은 ‘가짜 달걀’, ‘가짜 식용유’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거리에서 즐겨 먹었던 양 꼬치는 양고기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개고기는 물론 죽은 쥐의 고기를 화학약품으로 부드럽게 처리해 팔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온고지신과는 무슨 연관일까? 중국 고대 왕조들의 식품 위생 관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중국 왕조들 가운데 식품 위생 관리에 대한 규정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주나라 때 일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771년까지 존재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00년 전의 일인 셈이다. 예기(礼记)에 따르면 주나라는 제철이 아닌 과일이나 식물을 시장에서 팔지 못하도록 했다. 무분별한 사냥을 막기 위해 사냥철과 사냥 대상을 정해 놓고 때가 아니면 시장에서 거래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대를 건너 당나라에 이르러서 규정은 더욱 엄격해진다. 당나라는 618년 이연(李淵)이
롄둥(联动)의 활동에 장칭(江青) 등 중앙문혁소조의 소위 4인방은 불안을 느꼈다. 어린 학생의 도전이라고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가 먼저 위기를 느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롄둥의 뿌리는 베이징시 규찰대였고, 시청 규찰대는 국무원의 지도를 따르는 곳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보다 안정을 추구했다. 지역의 안정에 힘을 쏟은 조직이 바로 롄둥이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 12일 런민르바오(人民日报) 산하의 이론지 '훙치(红旗)'마저 이런 롄둥을 비판하고 나섰다. 모두 장칭 등 문혁 4인방이 뒤에서 힘을 쓴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고육지책을 썼다. 그는 롄둥이 소집한 집회에 참석해 "이제 롄둥 스스로 조직을 해산할 때"라고 말한다. 롄둥을 향해 독수를 준비하고 있던 장칭의 마음을 꿰뚫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장칭이 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장칭 등은 12월 18일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홍위병 1, 2, 3 사령부 그리고 수도병단 대표 등을 접견한다. 그리고 이들 대학생 홍위병 조직이 고등학생 조직인 '롄둥' 조직을 진압하도록 선동한다. "반동에는 나이가 없다. 어린 학생들을 때려 잡아라!" 소위 중앙문혁의 명령이었다. 베이징이 다시 혼돈에
중국 문화의 특징으로 꼽는 게 '담벼락 문화'다. 마을, 무리에 속해 강한 소속감을 가지는 문화를 의미한다. 내부의 결속은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중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문화를 용광로처럼 흡수해 발전해 나가면서도 분명히 존재했던 게 바로 '담벼락 문화'다. 담을 쌓는 문화는 오늘날 중국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아파트 단지마다 서로 철창을 둘러 싸 이웃 단지와 구별되게 한다. 한국 등 다른 나라도 물론 없지는 않지만 중국의 이 담벼락 문화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강해 보인다. 어디서 이런 문화가 유래했을까? 중국의 마을 어귀마다 세워졌던 패방(牌坊, 패루<牌楼>)를 이해하면 중국의 이런 담벼락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패방은 쉽게 말하면 문짝 없는 대형 문이다. 마을의 입구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지금도 차이나타운에 가면 쉽게 발견하게 된다. 패방이 마을 입구의 상징이 된 것은 수당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나라 때 도성을 구축하면서 정방형으로 마을을 나눠 이 한 단위를 리(里)라 불렀고, 이 제도는 당나라로 이어졌다. 다만 리가 방(坊)으로 변했을 뿐이다. 수와 당은 각 리, 방마다 담을 두르고 문을 만들어 관리했다. 시간에 따라
약법삼장의 20년 속박 속에 쌓인 장칭의 한은 문화대혁명으로 타올랐다. 린뱌오로 대표되는 군부의 지지까지 얻자 장칭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장칭(江青)은 이제 마오쩌둥(毛泽东)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 중국 정치무대로 나왔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 마오쩌둥이 큰 힘이 됐다. 전국 수억 명의 홍위병에게 박수를 받았다. 홍위병들은 장칭을 향해 "장칭 동지를 배우자"고 환호했다. 배우 장칭으로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박수였다. 문화대혁명이 불타오르면서 장칭의 마성도 점차 극에 달했다. 점차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마두가 되고 있었다. 이 시기 중국 공산당사(史)에는 저우언라이(周恩来)가 평생 처음으로 담배를 피게 됐다고 전한다. 장칭의 극한의 마성에 맞서지는 못하고, 그녀의 정치적 폭정에 최대한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는 것이다. 실제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그 속에서 점차 이성을 되찾는 홍위병들이 나타난다. 처음 장칭은 이들에게 접근해 다시 문화대혁명의 마성에 빠뜨리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자 본격적인 탄압을
본래 근본적 문제는 뿌리가 깊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법이다. 부국강국의 근본은 인재요, 교육이다. 한 명의 성군이 나와도 다양한 인재가 두루 퍼져 있지 않으면 대업을 이루기 어려운 법이다. 많은 가난한 나라가 모두 답을 알지만 실행하지 못한다.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급하게 해결할 게 너무 많다는 게 가난하고 문제가 많은 나라 지도자들의 생각이다. 본래 눈앞의 일이 급한 법이다. 자기 눈에 불이 나면 세상이 온통 불만 보인다. 정말 하지만, 그런 게 답일까? 눈앞에 불을 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모두가 답을 안다. 아니다. 정말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는데 대가가 싸고, 시간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제대로 된 치료법일까? 역시 아니다. 역사가 보여준다. 청나라 역시 다시 기사회생할 기회가 있었다. 황제가 나서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나라보다 만주족 황가의 안녕을 먼저 생각한 어머니 손에 좌절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부국강국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한 사람이 있다. 중국인이 아니라 영국인 선교사였다. 중국 이름이 이제마태(李提摩太)인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1845~1919)로 영국 웨일스의 침례교 가
장칭은 마오쩌둥과 미국인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1885~1970)의 접견을 기회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다. 바로 장칭에게 당 중앙이 가했던 20년 속박이 2년 먼저 깨진 것이다. 이제 약법삼장은 유명무실해졌다. 중국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신변 비서로 장칭은 자연스럽게 이후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그 기회는 1961년 찾아왔다. 하지만 그때 장칭은 물론 그 누구도 그 기회가 중국 전역을 피바람 속에 몰아넣는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칭의 모습은 그가 직접 쓴 시에서 표현했듯 '구름 속에 갇힌 산봉우리'였다. 江上有奇峰, 锁在云雾中 jiāng shàng yǒu qí fēng , suǒ zài yún wù zhōng 寻常看不见, 偶尔露峥嵘 xún cháng kàn bú jiàn , ǒu ěr lù zhēng róng 저 강물 위 기암괴석의 봉우리 구름 속에 갇혀 있네. 평소 잘 보이지 않지만, 가끔 그 위엄을 드러낸다네. 여기서 강(江)은 장칭(江青)의 강을 의미한다고 봤다. 봉우리는 스스로의 존엄이다. 장은 스스로 높은 존엄을 갖췄지만, 구름에 갇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름은 약법삼장의 제약을 가한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