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이면서 아내라 하지 못하고, 중국 영부인이면서 영부인 대접을 받지 못한 장칭(江青)의 한은 깊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서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힘을 발휘할 기회를 기다렸다. 문화대혁명의 단초가 된 '해서파관(海瑞罷官)'이 그것이다.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장칭은 정권을 향한, 당 중앙을 향해 나아가는 기회를 잡았고, 이어지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당 중앙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1965년 이후의 일이다. 그에 앞서 장칭은 인고의 시간을 참고 견뎌야 했다. 1938년 11월 20일 마오쩌둥(毛泽东)과 결혼하는 것을 당 중앙에게 허락받는 일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내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반대를 했다. 장칭이 이런 반대를 어떻게 이겨냈는지는 쉽게 상상이 안되는 대목이다. 오직 마오쩌둥의 결심만이 다른 사람의 반대를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돕기 위한 사례가 있다. 앞서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천윈(陈云)은 마오쩌둥과 동거 생활을 시작한 장칭에게 "마오는 아직 이혼을 한 상태가 아니다. 부인이 있으니 행동거지를 조심해 달라"라는 말을 했다. 장칭은 이 말을 곧바로 마오쩌둥에게 일러바친다. 마오쩌둥은 화가
중국의 개혁개방은 공식적으로 1978년 12월 제11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시작됐다. 그 뒤 반년이 지난 1979년 5월, 개혁개방과 함께 복간된 영화 잡지 '대중영화(大众电影)' 제5호에 '신데렐라'를 영화화한 영국 영화 '수정구두와 장미'가 소개된다. 내용은 별 것 아닌데 뒷표지에 실린 영화 스틸 컷이 문제가 된다. 화려한 궁전에서 신레렐라와 왕자가 키스하는 모습이 실린 것이다. 과거 극좌가 판을 치던 문화대혁명 시대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연히 여론의 풍파가 일었다. 신장위구르의 한 건설병단의 선전관은 흥분해 격렬한 논조로 이렇게 썼다.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장 시급한 일이 남녀의 키스를 허락하는 일이란 말인가? 마오 주석이 이끈 사회주의혁명국가에서 이런 사진을 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이미 대세였고 잡지사에 쏟아진 1만1200여 통 편지의 대부분은 키스 스틸 컷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이어 같은 해 중국 자체 제작 영화에서도 처음으로 키스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생활의 떨림(生活的颤音)'이란 영화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해 몰리는 관객의 안전을 우려해 소방관과 경찰들이 비상
첫째 마오쩌둥과 허쯔전의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한 장칭은 마오쩌둥의 부인이 아니다. 둘째 장칭은 마오쩌둥의 생활과 건강을 챙기지만 공산당 중앙에 어떤 요구도 할 권한이 없다. 셋째 장칭은 20년내 당 중앙에서 그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다. 당의 인사문제 및 정치업무에 관여할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이 장칭(江青)에게 마오쩌둥과의 결혼 전제 조건으로 내건 이른바 '약법삼장(约法三章)'의 골자다. 일단 장칭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꿈같은 신혼생활을 한다. 곧 딸 리나(李娜)를 낳았고 마오쩌둥은 그 딸을 너무도 예뻐했다. 그렇다면 장칭은 약법삼장을 마음으로 승복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장칭은 딸을 낳은 후 마오쩌둥과 한방을 쓰지 않았다. 공개 장소에서도 자주 다투기까지 했다. 공산당 자료에 따르면 장칭은 마오쩌둥이 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된 뒤 만났기에 대장정 등 고난을 함께한 시간이 없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의 사랑은 얻었지만 동지애는 얻지 못했다. 약법삼장은 서로간의 깊은 정이 없었던 마오쩌둥과 장칭의 관계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마오쩌둥은 장칭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약법삼장을 철저히 지켰다. 마오쩌둥은 항상 집의 서재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오늘날의 중국을 탄생시킨 인물이 바로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다. 덩샤오핑은 언제나 현장을 중시했다. "사무실에 앉아 보고를 받지만 말고 현장에 가 확인한 후 판단을 내리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이를 몸소 실천해 보여줬다. 지난 1974년 4월의 일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부총리로 재직하면서 중국을 대표해 유엔 총회 제6차 특별회의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했다. 뉴욕은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로 그 중심지는 당시에도 금융가 월스트리트였다. 반면 당시 중국은 1966년 시작된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1976년 종료)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였다. 당시 중국 대표단의 눈에 월스트리트는 말 그대로 '역사적 반동'의 무대였다. 그런 반동의 중심지에서 중국 대표단은 모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빡빡한 회의 일정을 마치고 맞이한 휴일인 4월 13일(토요일), 덩샤오핑은 중국 대표단원들에게 월스트리트에 가보자는 제안을 한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이 민감한 시기에 하필 반동의 중심지를 가다니? 그러나 덩샤오핑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는 반드시 월스트리트에 가봐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서방 세계
1966년 문화대혁명은 중국 대륙 전체를 불태운다. 곳곳의 홍위병들이 기존의 모든 권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10년간 중국을 비극 속으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화대혁명의 이면에 한 여인의 한(恨)이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장칭(江青, 1914~1991)이 그 주인공이다. 장칭은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성장한 후 생계를 해결하고자 배우가 됐고, 더 유명해지려는 욕망으로 남성 편력도 심했다. 장칭은 두 번째 남편이었던 중국 공산당 학생 지도자 위치웨이(俞启威)의 권유로 1933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위치웨이는 18기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 위정셩(俞正声)의 부친으로 신중국 첫 톈진 시장을 역임한다. 장칭과 위치웨이의 결혼 생활은 위치웨이가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면서 끝이 난다. 장칭은 이후 상하이로 갔고, 거기서 배우로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 만난 이들이 당대 유명 영화평론가 탕나(唐纳)와 유명 배우 장민(章泯)이다. 이 때 장칭은 이름을 란핑(蓝苹)으로 바꿨다. '푸른 사과'라는 의미다. 장칭은 탕나의 도움으로 당대 유명 영화잡지인 뎬퉁(电通)에 소개된다. 또 장민
1966년 7월 31일 베이징 날씨는 섭씨 25℃, 기온은 따뜻했지만 구름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늘의 구름도 구름이지만, 중난하이에는 문화대혁명의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毛泽东)은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정치국 11차 전체회의(이하 11중전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창(戈)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문화대혁명은 이른바 무산계급의 독재를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마오쩌둥이 발동을 건 문화대혁명의 이름으로 공격이 시작되면서 저우언라이(周恩来)도 점차 문화대혁명 시대 방패(干)의 역할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문화대혁명의 창과 방패, 바로 중국 공산당 당사가 규정한 문화대혁명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의 관계다. 1966년 8월 1일로 베이징에서 열린 11중전회는 처음부터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초반부터 마오쩌둥은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 중앙이 대학 혁명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어느 것 하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공작조 90% 이상이 나쁜 짓만 한다. 군중을 억제하고 제어하려고만 한다." 이어 마오쩌둥은 회의 첫날 바로 칭화(清华)
중국 후한시대 환관 채륜(蔡倫)이 개발한 가볍고 저렴한 종이(紙)는 중국 역사에서 문무(文武)의 발전에 모두 기여하게 된다. 종이와 학문의 뗄 수 없는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황이고, 무(武)의 측면에서 보자면 종이 갑옷이 대표적인 파생 상품으로 꼽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고대 병사들은 대부분 종이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 여러 겹의 종이에 무명이나 비단 등 천을 덧대 아교, 송진 등 접착제로 고착시킨 갑옷이었다. 종이 갑옷은 장점이 많았다. 철갑(鐵甲)에 비해 제작 비용이 훨씬 적었다. 철갑에 비해 무게가 적게 나가 전장에서 재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유용했다. 특히 물에 빠지는 경우에도 가라앉지 않아 수군에게 적합했다. 한 마디로 저비용 고효율 갑옷이었던 셈이다. 옛 중국 기록에도 그 나름 효과가 컸다고 나온다. 송나라 인종 때 발간된 국방백서인 ’무경총요(武经总要)‘에 따르면 당시 갑옷은 철, 가죽, 종이 등 세 가지 재료로 제작됐는데 일반 병사들이 착용한 종이 갑옷이 실제 전투에서 믿음직스러운 기능을 발휘했다고 기록돼 있다. 종이 갑옷에 대한 언급은 ’무경총요‘에 앞서 당나라 때도 엿보인다. 당 의종 때 한 절도사가 "종이로 갑옷을
1966년 5월 마오쩌둥의 '통지'는 문화대혁명 시동의 첫 명령이었다. 그 명을 받는 행동이 바로 베이징대학에서 나온다. 베이징대학에 첫 대자보가 붙었다. 베이징대 당 위원회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호응하듯 마오쩌둥(毛澤東)의 전국 홍위병 총궐기 명령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도 나온다. 이로써 중국 전역이 붉은 깃발로 물들게 된다.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무산계급의 혁명은 계속되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우파 수정주의를 제거하고 또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파 수정주의를 죽순의 껍질처럼 벗기고 또 벗겨야 무산계급의 순수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이 말은 바로 문서로 정리돼 전국에 시달됐다. 그해 5월 16일의 일이다. 문화대혁명의 전면적 개시를 선언한 이 통지가 이른바 '5·16 통지'로 불리는 이유다. 통지가 전파되고 응답은 의외의 곳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나왔다.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 대자보가 붙었다. 통지가 하달된 지 불과 열흘이 지나서였다. 베이징 중앙정치국 회의가 미처 끝나지도 않은 날이었다. 대자보 제목은 '루핑(陆平), 쏭숴(宋硕) , 펑페이
중국국가는 짧다. 1절이 전부다. 내용도 명료하다. 起来! 不愿做奴隶的人们! 把我们的血肉,筑成我们新的长城! 中华民族到了最危险的时候, 每个人被迫着发出最后的吼声。 起来! 起来! 起来! 我们万众一心,冒着敌人的炮火前进! 冒着敌人的炮火前进! 前进! 前进! 前进!进! 일어나라 ! (깨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여 !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만들자 ! 중화민족이 가장 위태로운 이 때에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최후의 함성이 터져나오리!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전진 ! 전진 ! 전진 ! 나아가자 ! 중국 국가의 별칭은 '의용군진행곡(义勇军进行曲)'이다. 1935년에 상하이에서 개봉된 영화 '풍운아녀(风云儿女)'의 주제곡, 즉 OST이다. 가사는 한 눈에 봐도 전투적이고 비장하다. 곡은 힘차고 울림이 장엄하다. 이런 내용과 느낌의 주제곡이 삽입된 영화라면 스토리가 어떠할지 감이 잡힌다. 영화가 개봉됐던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영화와 주제곡의 메시지가 더 명료해진다. 당시 상하이는 이미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행정권과 치외법권이 보장된 조계지가 광
1966년 4월 16일 중국 공산당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항저우(杭州)에서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毛泽东)은 “우한(吴晗)의 문제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하다"라는 발언을 통해 문화대혁명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다. 이 회의를 통해 문화대혁명은 중앙 무대에서 공식화됐고, 중국 전역으로 활활 타 들어갔다. 들불처럼 문화대혁명이 번졌지만, 아직 그 마화(魔火)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저우언라이(周恩来) 등 중난하이(中南海)의 지도자들을 알지 못했다. 1966년 4월 9일부터 12일까지 3차례 연이은 서기처 회의를 통해 이미 마오쩌둥의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에 대한 의도가 명확해졌다. 우한의 비판에 대한 비판이 문제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우한의 비판은 진정한 적을 불러내기 위한 유인책이었던 것이다. 이어 마오쩌둥은 1966년 4월 16일 항저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연다. 이제 메신저 보이, 캉성(康生)이 아닌 마오가 직접 나선 것이다. 중국의 주인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의 선봉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회의에는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류샤오치(刘少奇), 덩샤오핑(邓小平), 예젠잉(叶剑英) 등이 참석했다. "나는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