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월 12월 24일 중국 베이징 체육관에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68세의 한 노인이 초초한 듯 시간을 본다. 군중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세계의 절반이 크리스마스 이브 분위기에 젖어 있을 무렵이다. 중국 베이징 체육관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화혁명 사인방의 발호는 갈수록 심해졌다. 장칭(江青) 등 사인방은 당 중앙의 주요 간부들을 겨냥했다.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하나씩 제거해갔다. 사인방의 총과 칼은 당중앙 중난하이(中南海) 밖에 있는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이었다. 사인방은 외부 홍위병을 독려해 말썽을 일으키고, 그것을 문제삼아 당중앙 간부들을 낙마시켰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마오쩌둥(毛泽东)이 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는 그의 생애 가장 혹독한 10년을 겪게 된다. 그는 어떻게든 장칭 등이 제거하려 목표로 삼은 당간부들을 보호하려 했다. 사실 그게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모든 간부가 낙마를 하면 결국 저우언라이 자신도 낙마할 것이 뼌했다. 그렇다고 저우언라이 자신이 낙마하면서 남을 보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 역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장칭
‘온고지신(溫古知新)’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 공자의 말이다. 논어 위정 편에 나온다. 정말 많은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공자왈 맹자왈? 중국의 식품 위생 관리의 연원을 논하기 위해서다. 요즘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중국은 ‘가짜 달걀’, ‘가짜 식용유’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거리에서 즐겨 먹었던 양 꼬치는 양고기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개고기는 물론 죽은 쥐의 고기를 화학약품으로 부드럽게 처리해 팔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온고지신과는 무슨 연관일까? 중국 고대 왕조들의 식품 위생 관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중국 왕조들 가운데 식품 위생 관리에 대한 규정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주나라 때 일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771년까지 존재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00년 전의 일인 셈이다. 예기(礼记)에 따르면 주나라는 제철이 아닌 과일이나 식물을 시장에서 팔지 못하도록 했다. 무분별한 사냥을 막기 위해 사냥철과 사냥 대상을 정해 놓고 때가 아니면 시장에서 거래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대를 건너 당나라에 이르러서 규정은 더욱 엄격해진다. 당나라는 618년 이연(李淵)이
롄둥(联动)의 활동에 장칭(江青) 등 중앙문혁소조의 소위 4인방은 불안을 느꼈다. 어린 학생의 도전이라고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가 먼저 위기를 느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롄둥의 뿌리는 베이징시 규찰대였고, 시청 규찰대는 국무원의 지도를 따르는 곳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보다 안정을 추구했다. 지역의 안정에 힘을 쏟은 조직이 바로 롄둥이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 12일 런민르바오(人民日报) 산하의 이론지 '훙치(红旗)'마저 이런 롄둥을 비판하고 나섰다. 모두 장칭 등 문혁 4인방이 뒤에서 힘을 쓴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고육지책을 썼다. 그는 롄둥이 소집한 집회에 참석해 "이제 롄둥 스스로 조직을 해산할 때"라고 말한다. 롄둥을 향해 독수를 준비하고 있던 장칭의 마음을 꿰뚫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장칭이 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장칭 등은 12월 18일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홍위병 1, 2, 3 사령부 그리고 수도병단 대표 등을 접견한다. 그리고 이들 대학생 홍위병 조직이 고등학생 조직인 '롄둥' 조직을 진압하도록 선동한다. "반동에는 나이가 없다. 어린 학생들을 때려 잡아라!" 소위 중앙문혁의 명령이었다. 베이징이 다시 혼돈에
중국 문화의 특징으로 꼽는 게 '담벼락 문화'다. 마을, 무리에 속해 강한 소속감을 가지는 문화를 의미한다. 내부의 결속은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중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문화를 용광로처럼 흡수해 발전해 나가면서도 분명히 존재했던 게 바로 '담벼락 문화'다. 담을 쌓는 문화는 오늘날 중국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아파트 단지마다 서로 철창을 둘러 싸 이웃 단지와 구별되게 한다. 한국 등 다른 나라도 물론 없지는 않지만 중국의 이 담벼락 문화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강해 보인다. 어디서 이런 문화가 유래했을까? 중국의 마을 어귀마다 세워졌던 패방(牌坊, 패루<牌楼>)를 이해하면 중국의 이런 담벼락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패방은 쉽게 말하면 문짝 없는 대형 문이다. 마을의 입구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지금도 차이나타운에 가면 쉽게 발견하게 된다. 패방이 마을 입구의 상징이 된 것은 수당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나라 때 도성을 구축하면서 정방형으로 마을을 나눠 이 한 단위를 리(里)라 불렀고, 이 제도는 당나라로 이어졌다. 다만 리가 방(坊)으로 변했을 뿐이다. 수와 당은 각 리, 방마다 담을 두르고 문을 만들어 관리했다. 시간에 따라
약법삼장의 20년 속박 속에 쌓인 장칭의 한은 문화대혁명으로 타올랐다. 린뱌오로 대표되는 군부의 지지까지 얻자 장칭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장칭(江青)은 이제 마오쩌둥(毛泽东)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 중국 정치무대로 나왔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 마오쩌둥이 큰 힘이 됐다. 전국 수억 명의 홍위병에게 박수를 받았다. 홍위병들은 장칭을 향해 "장칭 동지를 배우자"고 환호했다. 배우 장칭으로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박수였다. 문화대혁명이 불타오르면서 장칭의 마성도 점차 극에 달했다. 점차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마두가 되고 있었다. 이 시기 중국 공산당사(史)에는 저우언라이(周恩来)가 평생 처음으로 담배를 피게 됐다고 전한다. 장칭의 극한의 마성에 맞서지는 못하고, 그녀의 정치적 폭정에 최대한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는 것이다. 실제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그 속에서 점차 이성을 되찾는 홍위병들이 나타난다. 처음 장칭은 이들에게 접근해 다시 문화대혁명의 마성에 빠뜨리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자 본격적인 탄압을
본래 근본적 문제는 뿌리가 깊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법이다. 부국강국의 근본은 인재요, 교육이다. 한 명의 성군이 나와도 다양한 인재가 두루 퍼져 있지 않으면 대업을 이루기 어려운 법이다. 많은 가난한 나라가 모두 답을 알지만 실행하지 못한다.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급하게 해결할 게 너무 많다는 게 가난하고 문제가 많은 나라 지도자들의 생각이다. 본래 눈앞의 일이 급한 법이다. 자기 눈에 불이 나면 세상이 온통 불만 보인다. 정말 하지만, 그런 게 답일까? 눈앞에 불을 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모두가 답을 안다. 아니다. 정말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는데 대가가 싸고, 시간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제대로 된 치료법일까? 역시 아니다. 역사가 보여준다. 청나라 역시 다시 기사회생할 기회가 있었다. 황제가 나서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나라보다 만주족 황가의 안녕을 먼저 생각한 어머니 손에 좌절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부국강국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한 사람이 있다. 중국인이 아니라 영국인 선교사였다. 중국 이름이 이제마태(李提摩太)인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1845~1919)로 영국 웨일스의 침례교 가
장칭은 마오쩌둥과 미국인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1885~1970)의 접견을 기회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다. 바로 장칭에게 당 중앙이 가했던 20년 속박이 2년 먼저 깨진 것이다. 이제 약법삼장은 유명무실해졌다. 중국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신변 비서로 장칭은 자연스럽게 이후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그 기회는 1961년 찾아왔다. 하지만 그때 장칭은 물론 그 누구도 그 기회가 중국 전역을 피바람 속에 몰아넣는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칭의 모습은 그가 직접 쓴 시에서 표현했듯 '구름 속에 갇힌 산봉우리'였다. 江上有奇峰, 锁在云雾中 jiāng shàng yǒu qí fēng , suǒ zài yún wù zhōng 寻常看不见, 偶尔露峥嵘 xún cháng kàn bú jiàn , ǒu ěr lù zhēng róng 저 강물 위 기암괴석의 봉우리 구름 속에 갇혀 있네. 평소 잘 보이지 않지만, 가끔 그 위엄을 드러낸다네. 여기서 강(江)은 장칭(江青)의 강을 의미한다고 봤다. 봉우리는 스스로의 존엄이다. 장은 스스로 높은 존엄을 갖췄지만, 구름에 갇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름은 약법삼장의 제약을 가한 당
아내이면서 아내라 하지 못하고, 중국 영부인이면서 영부인 대접을 받지 못한 장칭(江青)의 한은 깊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서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힘을 발휘할 기회를 기다렸다. 문화대혁명의 단초가 된 '해서파관(海瑞罷官)'이 그것이다.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장칭은 정권을 향한, 당 중앙을 향해 나아가는 기회를 잡았고, 이어지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당 중앙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1965년 이후의 일이다. 그에 앞서 장칭은 인고의 시간을 참고 견뎌야 했다. 1938년 11월 20일 마오쩌둥(毛泽东)과 결혼하는 것을 당 중앙에게 허락받는 일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내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반대를 했다. 장칭이 이런 반대를 어떻게 이겨냈는지는 쉽게 상상이 안되는 대목이다. 오직 마오쩌둥의 결심만이 다른 사람의 반대를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돕기 위한 사례가 있다. 앞서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천윈(陈云)은 마오쩌둥과 동거 생활을 시작한 장칭에게 "마오는 아직 이혼을 한 상태가 아니다. 부인이 있으니 행동거지를 조심해 달라"라는 말을 했다. 장칭은 이 말을 곧바로 마오쩌둥에게 일러바친다. 마오쩌둥은 화가
중국의 개혁개방은 공식적으로 1978년 12월 제11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시작됐다. 그 뒤 반년이 지난 1979년 5월, 개혁개방과 함께 복간된 영화 잡지 '대중영화(大众电影)' 제5호에 '신데렐라'를 영화화한 영국 영화 '수정구두와 장미'가 소개된다. 내용은 별 것 아닌데 뒷표지에 실린 영화 스틸 컷이 문제가 된다. 화려한 궁전에서 신레렐라와 왕자가 키스하는 모습이 실린 것이다. 과거 극좌가 판을 치던 문화대혁명 시대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연히 여론의 풍파가 일었다. 신장위구르의 한 건설병단의 선전관은 흥분해 격렬한 논조로 이렇게 썼다.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장 시급한 일이 남녀의 키스를 허락하는 일이란 말인가? 마오 주석이 이끈 사회주의혁명국가에서 이런 사진을 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이미 대세였고 잡지사에 쏟아진 1만1200여 통 편지의 대부분은 키스 스틸 컷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이어 같은 해 중국 자체 제작 영화에서도 처음으로 키스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생활의 떨림(生活的颤音)'이란 영화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해 몰리는 관객의 안전을 우려해 소방관과 경찰들이 비상
첫째 마오쩌둥과 허쯔전의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한 장칭은 마오쩌둥의 부인이 아니다. 둘째 장칭은 마오쩌둥의 생활과 건강을 챙기지만 공산당 중앙에 어떤 요구도 할 권한이 없다. 셋째 장칭은 20년내 당 중앙에서 그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다. 당의 인사문제 및 정치업무에 관여할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이 장칭(江青)에게 마오쩌둥과의 결혼 전제 조건으로 내건 이른바 '약법삼장(约法三章)'의 골자다. 일단 장칭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꿈같은 신혼생활을 한다. 곧 딸 리나(李娜)를 낳았고 마오쩌둥은 그 딸을 너무도 예뻐했다. 그렇다면 장칭은 약법삼장을 마음으로 승복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장칭은 딸을 낳은 후 마오쩌둥과 한방을 쓰지 않았다. 공개 장소에서도 자주 다투기까지 했다. 공산당 자료에 따르면 장칭은 마오쩌둥이 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된 뒤 만났기에 대장정 등 고난을 함께한 시간이 없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의 사랑은 얻었지만 동지애는 얻지 못했다. 약법삼장은 서로간의 깊은 정이 없었던 마오쩌둥과 장칭의 관계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마오쩌둥은 장칭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약법삼장을 철저히 지켰다. 마오쩌둥은 항상 집의 서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