롄둥(联动)의 활동에 장칭(江青) 등 중앙문혁소조의 소위 4인방은 불안을 느꼈다. 어린 학생의 도전이라고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가 먼저 위기를 느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롄둥의 뿌리는 베이징시 규찰대였고, 시청 규찰대는 국무원의 지도를 따르는 곳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보다 안정을 추구했다. 지역의 안정에 힘을 쏟은 조직이 바로 롄둥이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 12일 런민르바오(人民日报) 산하의 이론지 '훙치(红旗)'마저 이런 롄둥을 비판하고 나섰다. 모두 장칭 등 문혁 4인방이 뒤에서 힘을 쓴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고육지책을 썼다. 그는 롄둥이 소집한 집회에 참석해 "이제 롄둥 스스로 조직을 해산할 때"라고 말한다. 롄둥을 향해 독수를 준비하고 있던 장칭의 마음을 꿰뚫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장칭이 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장칭 등은 12월 18일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홍위병 1, 2, 3 사령부 그리고 수도병단 대표 등을 접견한다. 그리고 이들 대학생 홍위병 조직이 고등학생 조직인 '롄둥' 조직을 진압하도록 선동한다. "반동에는 나이가 없다. 어린 학생들을 때려 잡아라!" 소위 중앙문혁의 명령이었다. 베이징이 다시 혼돈에
약법삼장의 20년 속박 속에 쌓인 장칭의 한은 문화대혁명으로 타올랐다. 린뱌오로 대표되는 군부의 지지까지 얻자 장칭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장칭(江青)은 이제 마오쩌둥(毛泽东)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 중국 정치무대로 나왔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 마오쩌둥이 큰 힘이 됐다. 전국 수억 명의 홍위병에게 박수를 받았다. 홍위병들은 장칭을 향해 "장칭 동지를 배우자"고 환호했다. 배우 장칭으로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박수였다. 문화대혁명이 불타오르면서 장칭의 마성도 점차 극에 달했다. 점차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마두가 되고 있었다. 이 시기 중국 공산당사(史)에는 저우언라이(周恩来)가 평생 처음으로 담배를 피게 됐다고 전한다. 장칭의 극한의 마성에 맞서지는 못하고, 그녀의 정치적 폭정에 최대한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는 것이다. 실제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그 속에서 점차 이성을 되찾는 홍위병들이 나타난다. 처음 장칭은 이들에게 접근해 다시 문화대혁명의 마성에 빠뜨리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자 본격적인 탄압을
장칭은 마오쩌둥과 미국인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1885~1970)의 접견을 기회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다. 바로 장칭에게 당 중앙이 가했던 20년 속박이 2년 먼저 깨진 것이다. 이제 약법삼장은 유명무실해졌다. 중국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신변 비서로 장칭은 자연스럽게 이후의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그 기회는 1961년 찾아왔다. 하지만 그때 장칭은 물론 그 누구도 그 기회가 중국 전역을 피바람 속에 몰아넣는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칭의 모습은 그가 직접 쓴 시에서 표현했듯 '구름 속에 갇힌 산봉우리'였다. 江上有奇峰, 锁在云雾中 jiāng shàng yǒu qí fēng , suǒ zài yún wù zhōng 寻常看不见, 偶尔露峥嵘 xún cháng kàn bú jiàn , ǒu ěr lù zhēng róng 저 강물 위 기암괴석의 봉우리 구름 속에 갇혀 있네. 평소 잘 보이지 않지만, 가끔 그 위엄을 드러낸다네. 여기서 강(江)은 장칭(江青)의 강을 의미한다고 봤다. 봉우리는 스스로의 존엄이다. 장은 스스로 높은 존엄을 갖췄지만, 구름에 갇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름은 약법삼장의 제약을 가한 당
아내이면서 아내라 하지 못하고, 중국 영부인이면서 영부인 대접을 받지 못한 장칭(江青)의 한은 깊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서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힘을 발휘할 기회를 기다렸다. 문화대혁명의 단초가 된 '해서파관(海瑞罷官)'이 그것이다.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장칭은 정권을 향한, 당 중앙을 향해 나아가는 기회를 잡았고, 이어지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당 중앙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1965년 이후의 일이다. 그에 앞서 장칭은 인고의 시간을 참고 견뎌야 했다. 1938년 11월 20일 마오쩌둥(毛泽东)과 결혼하는 것을 당 중앙에게 허락받는 일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내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반대를 했다. 장칭이 이런 반대를 어떻게 이겨냈는지는 쉽게 상상이 안되는 대목이다. 오직 마오쩌둥의 결심만이 다른 사람의 반대를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을 돕기 위한 사례가 있다. 앞서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천윈(陈云)은 마오쩌둥과 동거 생활을 시작한 장칭에게 "마오는 아직 이혼을 한 상태가 아니다. 부인이 있으니 행동거지를 조심해 달라"라는 말을 했다. 장칭은 이 말을 곧바로 마오쩌둥에게 일러바친다. 마오쩌둥은 화가
첫째 마오쩌둥과 허쯔전의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한 장칭은 마오쩌둥의 부인이 아니다. 둘째 장칭은 마오쩌둥의 생활과 건강을 챙기지만 공산당 중앙에 어떤 요구도 할 권한이 없다. 셋째 장칭은 20년내 당 중앙에서 그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다. 당의 인사문제 및 정치업무에 관여할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이 장칭(江青)에게 마오쩌둥과의 결혼 전제 조건으로 내건 이른바 '약법삼장(约法三章)'의 골자다. 일단 장칭도 받아들인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꿈같은 신혼생활을 한다. 곧 딸 리나(李娜)를 낳았고 마오쩌둥은 그 딸을 너무도 예뻐했다. 그렇다면 장칭은 약법삼장을 마음으로 승복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장칭은 딸을 낳은 후 마오쩌둥과 한방을 쓰지 않았다. 공개 장소에서도 자주 다투기까지 했다. 공산당 자료에 따르면 장칭은 마오쩌둥이 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된 뒤 만났기에 대장정 등 고난을 함께한 시간이 없었다. 그 결과 마오쩌둥의 사랑은 얻었지만 동지애는 얻지 못했다. 약법삼장은 서로간의 깊은 정이 없었던 마오쩌둥과 장칭의 관계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마오쩌둥은 장칭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약법삼장을 철저히 지켰다. 마오쩌둥은 항상 집의 서재에서
1966년 문화대혁명은 중국 대륙 전체를 불태운다. 곳곳의 홍위병들이 기존의 모든 권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10년간 중국을 비극 속으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화대혁명의 이면에 한 여인의 한(恨)이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장칭(江青, 1914~1991)이 그 주인공이다. 장칭은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성장한 후 생계를 해결하고자 배우가 됐고, 더 유명해지려는 욕망으로 남성 편력도 심했다. 장칭은 두 번째 남편이었던 중국 공산당 학생 지도자 위치웨이(俞启威)의 권유로 1933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위치웨이는 18기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 위정셩(俞正声)의 부친으로 신중국 첫 톈진 시장을 역임한다. 장칭과 위치웨이의 결혼 생활은 위치웨이가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면서 끝이 난다. 장칭은 이후 상하이로 갔고, 거기서 배우로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 만난 이들이 당대 유명 영화평론가 탕나(唐纳)와 유명 배우 장민(章泯)이다. 이 때 장칭은 이름을 란핑(蓝苹)으로 바꿨다. '푸른 사과'라는 의미다. 장칭은 탕나의 도움으로 당대 유명 영화잡지인 뎬퉁(电通)에 소개된다. 또 장민
1966년 7월 31일 베이징 날씨는 섭씨 25℃, 기온은 따뜻했지만 구름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늘의 구름도 구름이지만, 중난하이에는 문화대혁명의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毛泽东)은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정치국 11차 전체회의(이하 11중전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창(戈)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문화대혁명은 이른바 무산계급의 독재를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마오쩌둥이 발동을 건 문화대혁명의 이름으로 공격이 시작되면서 저우언라이(周恩来)도 점차 문화대혁명 시대 방패(干)의 역할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문화대혁명의 창과 방패, 바로 중국 공산당 당사가 규정한 문화대혁명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의 관계다. 1966년 8월 1일로 베이징에서 열린 11중전회는 처음부터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초반부터 마오쩌둥은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 중앙이 대학 혁명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어느 것 하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공작조 90% 이상이 나쁜 짓만 한다. 군중을 억제하고 제어하려고만 한다." 이어 마오쩌둥은 회의 첫날 바로 칭화(清华)
1966년 5월 마오쩌둥의 '통지'는 문화대혁명 시동의 첫 명령이었다. 그 명을 받는 행동이 바로 베이징대학에서 나온다. 베이징대학에 첫 대자보가 붙었다. 베이징대 당 위원회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호응하듯 마오쩌둥(毛澤東)의 전국 홍위병 총궐기 명령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도 나온다. 이로써 중국 전역이 붉은 깃발로 물들게 된다.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무산계급의 혁명은 계속되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우파 수정주의를 제거하고 또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파 수정주의를 죽순의 껍질처럼 벗기고 또 벗겨야 무산계급의 순수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이 말은 바로 문서로 정리돼 전국에 시달됐다. 그해 5월 16일의 일이다. 문화대혁명의 전면적 개시를 선언한 이 통지가 이른바 '5·16 통지'로 불리는 이유다. 통지가 전파되고 응답은 의외의 곳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나왔다.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 대자보가 붙었다. 통지가 하달된 지 불과 열흘이 지나서였다. 베이징 중앙정치국 회의가 미처 끝나지도 않은 날이었다. 대자보 제목은 '루핑(陆平), 쏭숴(宋硕) , 펑페이
1966년 4월 16일 중국 공산당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항저우(杭州)에서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毛泽东)은 “우한(吴晗)의 문제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하다"라는 발언을 통해 문화대혁명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다. 이 회의를 통해 문화대혁명은 중앙 무대에서 공식화됐고, 중국 전역으로 활활 타 들어갔다. 들불처럼 문화대혁명이 번졌지만, 아직 그 마화(魔火)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저우언라이(周恩来) 등 중난하이(中南海)의 지도자들을 알지 못했다. 1966년 4월 9일부터 12일까지 3차례 연이은 서기처 회의를 통해 이미 마오쩌둥의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에 대한 의도가 명확해졌다. 우한의 비판에 대한 비판이 문제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우한의 비판은 진정한 적을 불러내기 위한 유인책이었던 것이다. 이어 마오쩌둥은 1966년 4월 16일 항저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연다. 이제 메신저 보이, 캉성(康生)이 아닌 마오가 직접 나선 것이다. 중국의 주인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의 선봉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회의에는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류샤오치(刘少奇), 덩샤오핑(邓小平), 예젠잉(叶剑英) 등이 참석했다. "나는 단
야오원위안(姚文元)의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은 시간이 갈수록 정치화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周恩来 ) 등 중난하이 지도자들은 여전히 그 정치화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피하려 노력했다. 물이 차오르면 물속에 있는 모든 것은 절로 젖는다. 피신처는 물밖에 있다. 물길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왕왕 사람들은 차오르는 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려 노력한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는 점점 가팔라졌다. 저우언라이 등 중난하이(中南海)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인식은 했지만, 그 위험 정도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66년 2월 6일 열린 '문화혁명오인소조'의 보고는 그런 인식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일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에서 일상 업무를 보던 덩샤오핑(邓小平), 류샤오치(刘少奇) 등과 함께 문화혁명오인소조의 문화 학계의 토론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는다. 문화혁명오인소조의 조장은 베이징 시장 펑전(彭真)이었다. 펑전은 보고에서 "작금의 토론(해서파관에 대한 비판과 이 비판에 대한 비판)은 순수한 학술적 토론이고 정치적 토론이 아니다. 해서파관의 작가 우한(吴晗)은 펑더화이(彭德怀)와 어떠한 관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