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1월 중국 전역을 10여 년 휩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타오른다. 신중국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자기파괴의 불길은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가 아니라 저 멀리 상하이에서 시작됐다. 상하이에서의 이 같은 움직임을 류샤오치(刘少奇)나 저우언라이(周恩来) 등 당대 중난하이 지도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중난하이와 먼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도자들이 정신없이 바빴다.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나라살림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천이(陈毅) 등 당대 중국 지도자들은 모든 역량을 경제 회복에 집중했다. 자연히 나라살림을 책임진 총리 저우언라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바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가뭄 등 자연재해가 지속돼 저우언라이를 괴롭혔다. 전국 주요 피해지역의 가뭄대책 현황을 점검하느라 아예 베이징을 비우는 날이 더 많았다. 농촌일이 마음에 걸려 자리를 비우니,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펑전에게 내게 전화를 하도록 하시오, 그럼 내 언제든 다시 베이징으로 달려오겠소. 당시 저우언라이가 류샤오치 등 당 중앙 지도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중국의 비밀을 감춘 곳, 바로 중난하이(中南海)다. 그 중난하이 풍운의 역사가 바로 신중국의 역사다. 중국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 바로 중난하이(中南海)다. 남쪽 바다 한가운데라니? 구중심처보다 더 은밀한 맛이 있다. 중난하이는 사실 중해와 남해를 함께 부르는 명칭이다. 베이징 자금성 서쪽에 인공으로 만든 큰 호수 두 곳이 바로 중해와 남해다. 과거 명청시대 때부터 황제의 쉼터, 귀족과 고관대작들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그만큼 경치도 아름답다. 청나라가 망한 뒤 중화민국 정부가 1925년 10월 10일 자금성을 고궁박물관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키로 하면서 중난하이는 자금성을 대신해 중국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그 순간, 중난하이의 평지풍파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각 지역 정치 세력은 물론이고, 외세 일본까지 참여한 소위 '중난하이 왕좌의 게임'이 벌어진 것이다. 마오쩌둥(毛泽东)의 공산당은 지방 군벌이 득세하면서 정치 중심의 지위가 흔들린다. 하지만 그도 잠시일 뿐. 공산당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중난하이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베이징이 공산당 천하 중국의 수도가 됐고,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건국공신들은 중난하이에 살기 시작했다. 역시 피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