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되는 둘이다. 연인의 키스요,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의 입이다. 한자 합(合)의 이야기다. 쉽지만 어려운 이야기다. 하나와 하나가 더해져 다시 하나가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 속에 인간만이 쉽게 한다. 한자 합은 그런 합일(合一)의 깨우침을 담고 있다. 합은 아주 오래된 한자다. 한자 초기에 갑골문이 있다. 글자의 모양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크게 벌린 입이 아래 입을 감싸는 모양이다. 간단히 입과 입이 만나는 모습이다. 키스다. 키스는 인간사 남녀 간의 일이다. 남녀가 하나 되는 첫 순간이다. 셰익스피어는 키스를 '수줍어 붉어진 두 순례자의 입술'이라고 찬미했다. '유쾌한 숨바꼭질'이라 표현한 작가도 있다. 클림트의 키스는 금빛 황홀경이고, 뭉크의 키스는 뭔가 불안하기만 하다. 샤갈의 키스는 꿈 속 키스이고, 피카소의 키스는 핑크빛 초현실주의다. 어떤 키스는 너무나 현실적이며 어떤 키스는 너무나 단순하기만 하다. 키스는 인간의 첫 생산의 시작이다. 키스로 하나 되고 그 하나는 다시 셋이 된다. 합이란 한자는 이 기묘한 인간만의 방정식 부호다. 일에 일을 더해 하나가 됐다가 다시 삼이 되는 인간사 덧셈, 시너지다. 가장 에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게 있다. 삶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들이다. 현명이라 함은 별다른 게 아니다. 눈으로만 보지 말며, 귀로만 듣지 않을 때 그래서 보는 것이 다가 아님을, 듣을 것이 다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것이다. 바람 풍(風) 자가 전하는 지혜다. 바람 풍은 본래 상형자다. 상형자란 모양을 본 딴 글자다. 그런데 바람에 모양이 있던가? 도대체 선인은 무엇을 보고 바람 풍이라 했는가? 사실 이 질문 때문에서 바람 풍을 형성자라는 주장도 있다. 이해도 되고 일리도 있다. 본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본 것만이 다이고 들은 것만이 다라는 주장도 있다. 틀리지만 않다. 다른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의 길이가 다른 것이다. 보는 이는 길고, 보지 못하는 이는 짧을 뿐이다. 장자의 봉황과 참새처럼 그렇게 둘은 세상을 살아간다. 보는 게 다르다고 세상 자체가 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본다. 바람 풍의 글자를 처음 쓴 누군가도 귀로 들을 것을, 얼굴에 스치는 감각을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辯已忘言” (산기일석가 비조상여환 차중유진의 욕변이망언” “산 노을 지면, 둥지로 돌아가는 저 새들 그게 참 뜻이거늘 …. 순간 말을 잊노라” (도연명) 삶과 죽음, 그리고 진실 이 세 단어는 사실 하나다. 보이는 면이 다를 뿐이다. 진실은 생과 사를 관통하는 시작점과 마침표다. 생은 다만 죽음에서 나와 삶의 시작이요 사는 다만 인생에서 나와 삶의 끝일 뿐이다. 태어나 아무 것도 몰라 진실하고 죽어 더 이상 거짓을 할 수 없어 진실하다. 이 두 진실의 순간, 생(生)과 사(死)를 이어주는 게 바로 삶이다. 삶에서 인간은 진실을 추구할 뿐 진실할 수는 없다. 유일한 진실한 순간은 바로 생사의 순간이다. 나고 죽는 그 순간 인간은 순수하게 된다. 삶이 그대를 속이는 탓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은 진실을 배반하게 만든다. 인간은 그저 삶 속에서 진실하려 노력할 뿐이다. 마치 하늘의 도리가 ‘항’(恒:항상 그런 것)이요, 땅 위 인간의 도리가 ‘항지(恒之:항상 그럴려고 그런 것)이듯 인간의 삶 속에서 진실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게 삶의 도리다. 태어남의 진실의 순간에서 인생의 또 다른 진실의 순간 삶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으
하늘을 보라. 구름이 보이는가? 해와 달은 보이는가? 다시 묻자. 보이는 하늘은 공간인가? 시간인가? 하늘에서 무엇을 보는가.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지혜가 삶의 근원적 질문과 답이 담겨져 있다. 수천 년 한자가 담아 전하는 선인의 지혜다. 다시 묻자. 하늘은 공간인가? 시간인가? 한자 천(天)은 공간인가? 시간인가? 이 질문의 답이 인류가 문명을 일구는 단초다. 그래서 하늘 천(天)은 일찍이 갑골자에 나온다. 묘한 게 하늘 천(天)은 하늘이 아니다. 모양을 본 뜬 상형자인데, 하늘을 본 뜬 게 아니라 사람을 본 떴다. 하늘 천(天)이 가르키는 건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다. 하늘을 보는 큰 사람이다. 큰 사람, 하늘을 보는 큰 사람이다. 더 정확히 하늘 천(天)은 하늘의 해가 큰 사람의 머리 위를 지나 동편에서 서편으로 가는 한 장면을 담고 있다. 멈춘 공간이 아니라 움직이는 공간, 하늘이 담은 시간이다. 그래서 아직도 중국에선 천을 하늘 천이라 하지 않고 하루 천이라 한다. 하루를 담은 하늘 그게 진정한 하늘이다. 인류는 태어나면서 천을 봤다. 공간을 봤고, 그 공간의 변화를, 시간을 봤다. 최초의 인류는 하늘에서 해를 보고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됐고 달을
복은 바라는 게 아니다. 감사하는 것이다. 조상에게 이웃에게 내 가족에게 내 친구에게 이렇게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며 감사하는 것이다. 고마워하는 것이다. 복은 그렇게 오는 것이다. 먼저 감사를 보내야 오는 게 바로 복이다. 어느 시기 복을 바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복이란 개념은 오래 전, 인류가 의식을 깨 생활을 시작한 이래 바로 그 순간부터 인류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갑골문에서 복은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다. 술 항아리를 든 두 손이 너무도 명확해 다른 이견이 없다. 사실 제사는 별개 아니다. 그저 감사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한 해의 고생의 결실을 보는 추수의 순간에 곁에 없는 혈육에 가족에, 친구에게 이웃에게 동족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이 ‘나도 이렇게 기억되겠구나’는 사실을 공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이들이 자신을 기억해주는 이들을 소중해하고, 아끼어 그렇게 연대하고, 하나로 일치하도록 하는 게 바로 복이다. 복은 바라는 게 아니다. 가족에 감사하는 것이고, 이웃을 아끼는 것이며 동족과 하나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내가 복 됐구나 느끼며 복을 누리는 것이다. 서로 감사하고 서로 아끼며
시간은 공간의 변화다. 공간이 있어 시간은 시작된다. 공간이 시간이며 시간이 공간이다. 한 공간의 변화, 공간 한 부분의 변화가 바로 시간이며 일이다. 일의 단위다. 일은 하나의 변화이다. 변화가 시간이니, 결국 일은 시간이다. 시간은 모두 세 종류가 있다. 하늘의 시간 땅의 시간 사람의 시간이다. 하늘의 시간은 항상 그렇다. 해는 항상 하루 만에 떠서 지고 달은 항상 한 달에 차고 기운다. 땅의 시간은 반대다. 항상 그렇지 않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일생으로 살고 일년생 풀은 열두 달을 일생으로 산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이는 50세를 못넘기고 어떤 이는 90세를 누린다. 같은 나무라도 어느 나무는 수십년을 살고 어느 나무는 수백년을 산다. 땅의 모든 것의 한 생은 제각기지만, 각기 누군가가 정하여준 듯 그렇게 각자의 일생을 산다. 운명이라고 부른다. 한 나무는 한 나무의 운명을 따르고, 한 사슴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다만 이 땅의 모든 시간 이 땅 모든 객체의 운명은 하늘의 시간에 하늘의 운명에 수렴한다. 하늘의 따라 결국 하늘의 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하늘의 시간을 항상 그렇다고 해 항(恒)이라고 하고 땅의 시간을
대로 양변을 가득 채운 군중이 환호를 한다. 왕정시대에는 왕의 행차가 그 사이를 걸었고 전쟁에 나가 승리한 군대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관료가 그 사이를 걸으며 대로 양변 가득한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 요즘도 건국기념일의 군 열병식이, 국제무대에서 공을 세운 운동선수의 퍼레이드가 가끔씩 열려 대로 양변 가득한 군중의 환호를 받는다. 환호와 함께 하늘에선 바람결에 종이꽃이 흩날린다. 군중의 환호는 군중의 칭찬이다. 온 나라의 칭찬이다. 바로 덕(德)이다. 덕은 별다른 게 아니다. 모두가 칭찬하는 일을 하는 게 덕이다. 공부를 잘한 학생이 선생의 칭찬을 듣고 효를 다한 자녀가 부모의 칭찬을 받는 그런 개인적인 칭찬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큰 칭찬이다. 모두를 이끌어가는 칭찬, 그게 바로 덕이다. 그래서 덕은 고대에 더욱 중요했다. 일찌감치 갑골문에서 등장한다. 갑골문의 덕은 사거리의 행(行)과 장식을 단 눈(目)의 결합이다. 어떤 이는 장식을 단 눈을 직(直)으로 보기도 한다. 금문에 오면서 마음 심(心)이 더해졌다. 그런 칭찬을 듣는 마음일까, 아니면 그런 칭찬이 사로잡는 군중의 마음일까. 사실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마음 심(心)이 더해지면서
천지(天地)간에 사람이 유별난 이유다. 사람만이 동(同)할 수 있다. 동(同)할 수 있기에 천지간 사람이 유일한 것이다. 맹수도 여럿이 무리지어 사냥을 하고 양떼도 무리지어 서로를 보살피지만 오직 천지간 사람만이 무리짓기를 넘어 동(同)할 수 있다. 동(同)이란 구령에 맞춰 노를 젓는 것이다. 배(舟) 아래 있는 입(口)이 동이다. 일찌감치 갑골자에 나온다. 초기 갑골자 중에는 배의 노를 젓는 손 모습이 나온다. 사람이 그리도 일찍 손과 손을 합쳐 배를 저었던 것이다. 일찌감치 손과 손을 합쳐 구령에 맞춰 논밭을 일구고 건물을 짓고 산을 개간하며 바다를 간척해 세상에 없던 새것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바보 노인이 산을 옮기다)의 고사도 동(同)의 의미에 담겨 있다. 4명의 손이 모여 배를 움직이며 40명의 손들이 모이면 들의 바위를 옮기고 400, 4000명의 손들은 물줄기를 바꾸며 4만, 4억 명의 손들은 산 하나를 옮기는 것이다. 동(同)의 조건은 하나의 구령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의 구령만 있고 나머지 모두는 손이어야 한다. 그래야 동(同)은 결실을 맺는다. 구령이 멈추면 손들은 다툴 수밖에 없다. 서로 먼저 내밀려 혹 서로 감추려 혹 각
마음에 담는다. 잊지 않겠다는 말인데, 이 말처럼 무서우면서도 다감한 말이 있을까? 좋은 일을 잊지 않겠다고 하면 반드시 감사하겠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나쁜 일을 잊지 않겠다고 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마음이란 말은 그만큼 의미가 깊다.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그 사람의 성향도 달라진다. 주로 좋은 일을 담으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주로 나쁜 일을 담으면 독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마음에 무엇을 담을지 신중하게 노력할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사람이 좋은 일만 마음에 담고 살고, 나쁜 일만 마음에 담고 살까. 누구나 조금씩 좋은 일을 담고, 나쁜 일도 담고 그러고 산다. 다만 스스로를 수양해 다스려 노력할 뿐이다. 한자의 마음 심(心)에는 이 같은 이치가 담겨 있다. 마음 심(心)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정밀한 상형문자다. 사람의 심장을 실물에 맞게 가장 잘 추상화했다. 두 개의 심방과 두 개의 심실 모습이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심장의 핏줄이 3개라는 점이다. 심(心)자 속의 3개의 점은 마치 이 핏줄마저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글자를 만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심장을 직접 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섬뜩함마
스스로 있기에 남과 다르고, 달라서 새 합이 되는 것이다. 소리가 다르기에 화음이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이다. 본래 자연(自然)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이 자연이다. 스스로 같은 게 각자의 존재가 가장 자연스러운 게 바로 자연인 것이다. 산이 산 같으며 강이 강과 같고 하늘이 하늘 같은 것이다. 돌은 돌이요, 나무가 나무이며, 새는 새요, 풀은 풀인 게 자연인 것이다. 내가 나 같고, 너가 너 같은 게 바로 자연인 것이다. 그런 스스로인 존재 하나하나의 모임이, 합(合)이 바로 자연인 것이다. 합은 다른 두 입의 ‘키스’다. 자연이 존재의 ‘키스’인 셈이다. 다르기에 어울리는 게 자연이다. 자연은 사물의 어울림이요, 화(和)는 소리의 어울림이다. 화(和)는 사람이 낸 첫 소리다. 벼를 수확해 먹고 난 뒤 입에 문 벼의 줄기를 불어 낸 소리다. 농경이 뿌리를 내린 금문시대, 주나라 이후 중요한 단어가 된다. 가장 원초적인 배고픔을 해결한 뒤 가장 원초적인 만족의 상태에서 불어낸 첫 풀피리다. 만족의, 행복의 소리다. 나도, 너도 만족한 뒤, 불어내는 ‘만족의 소리’다. 만족의 양, 만족의 기준은 서로 달라도 모두가 만족해 부는 풀피리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