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 무엇이더냐? 있고, 없는 게 생이다. 없어야 있을 수 있고, 있어야 비울 수 있다. 이룸이 무엇이더냐? 어렵고 쉬운 게 이룸이다. 어려워야 쉬울 수 있고, 쉬워야 어려울 수 있다. 형태란 무엇이더냐? 길고 짧은 게 형태다. 길어야 짧아지고 짧아야 길어진다. 서로 다른 길이들이 만드는 게 모양이다. 같은 길이는 한 가지 모양만 만든다. 화음이 무엇이더냐? 음 높이가 다른 음들의 어울림이다. 한 음으로는 노래를 만들 수 없다. 그럼 따른다는 게 무엇이더냐? 앞과 뒤가 같이 있어야 비로소 따를 수 있는 것다. 네가 앞이냐? 내가 뒤냐? 방향만 달리하면 내가 앞이고 네가 뒤다. 결국, 앞은 뒤의 다른 이름이요, 뒤는 앞의 다른 이름이다. 이 모든 게 항상 그렇다. 노자는 이 도리를 ‘항’(恒)라 부르고, 혹자는 이 도리를 ‘조화’라고 부른다. “有无相生,难易相成,长短相形,高下相盈,音声相和②,前后相随,恒也。”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영, 음성상화, 전후상수, 항야) "유무가 같이 생을 만들고, 쉬음과 어려움이 같이 성공을 만든다. 길고 짧은 게 같이 모양을 만들며, 높고 낮음이 같이 채움을 이뤄진다. 소리와 소리가 겹쳐 화음을 이루며, 앞과 뒤가
옛날 부가가치 생산이 극히 적었던 시절, 돈을 버는 방법은 간단했다. "버는 것보다 적게 써라. " 본래 과거 농사일은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농사를 져서 수확하는 것으로, 투여되는 자본이 극히 적었다. 노동력이 대부분이었다. 간단히 그렇게 걷어들인 곡물을 시장에 내놔 돈을 얻으면 그 돈에서 생활비로 쓰고 남는 게 축적되는 자본이었다. 그러니 아껴쓰면 쓸수록 부자가 됐다. 이에 옛날 중국 유머에는 자린고비에 대한 일화가 많다. 읽다보면, '뭘 이렇게 까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는 이들의 서민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 아련할 때가 많다. 옛날 중국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부자가 둘이 있었다. 둘 다 술을 좋아했는데, 워낙 자린고비들이어서 술을 마시는 데 돈을 쓸 수가 없었다. 이 두 부자는 고심 끝에 이들만의 독특한 '음주법'을 만들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재미있었는지, 두 부자의 음주법은 동네를 넘어 이웃마을까지 전해졌을 정도다. 그럼 그 음주법은 뭘까? 술을 젓가락으로 마시는 방법이다. 술 한 잔을 놓고 젓가락으로 떠서 마시는 것이다. 젓가락을 너무 많이 적셔도 안된다. 적당한 깊이만 젓가락을 술에 적셔서 마시는 게 이들의 독특한 음주법이다
모든 존재에 도의 원칙은 예외가 없다. 유한의 존재도, 무한의 존재도, 모두 도의 품에 있는 것이다. 있음 유(有)과 없음 무(無) 둘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있고서야, 비로소 없을 수 있고, 없고서야, 비로소 있을 수 있다. 배 고프냐? 이제 배 부를 수 있겠구나! 배 고픔의 시작이 배 부름이요, 배 부름의 시작이 배 고픔인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세상의 쉽고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다. 노자는 너무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독특한 화법을 구사한다. 반어적 효과를 극대화한 ‘상생의 화법’이다. 가는 건 머문 탓이다. 한 쪽이 오르면 다른 쪽은 내려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둘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하나요. 추와 미가 하나다. 세상엔 만물이 있지만, 하나의 도만 있다. 하나의 도만 있다는 건 결국 세상이 하나요, 그 세상의 만물이 하나란 의미다. 유가 있어 비로소 무가 있다는 상생의 도리를 그대로 화법에도 적용한 ‘상생어법’이다. 처음 이상한 이 말은 곱씹을수록 논리에 이치에 맞는다. “네가 선해지려는 것은 그 악을 알기 때문이요. 네가 예뻐지려는 것은 네가 그 추함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악함은 착함의 모자란
‘멍~멍!’ 개소리 한 번 하구유. 목 좀 푸는거유. ‘아~, 멍멍’ 음. 잘 지냈남유. 덥지유. 답답허지유. 이 게 날씨 탓임감유? 세상 탓인감유? 참 덥고 짜증나고 답답혀유. 맞아유. 세상이 잘 안돌아가쥬? 뭔가 이상혀유. 사실 트럼프만 이상한 게 아녀유. 이재명이나, 윤석열이나 트럼프 못지 않게 ‘이상혀유’ 참 이해가 안되쥬? 트럼프는 미국의 재벌 중 하나이쥬. 그런 사람이 왜 저렇게 이야기하고, 저렇게 사람들을 선동하나 싶쥬. 원하는 세상이, 그가 추종하는 ‘미국 제일주의’가 왜 그렇게 못 나보이는지. 트럼프 미국 제일주의는 간단해유. 미국인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양보해야 한다는 거쥬. 실은 트럼프가 못난 것도, 이상한 것도 바로 그 점이쥬. 다른 나라도 실은 트럼프처럼 생각허거든유. ‘내 행복을 위해 모두가 양보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 말조차 못혀유. 왜? 아니까, 나랑 남들이 같은 걸 아니까. 그래서 나만 좋자하고 하면 모두가 불편해지고, 결국 나 역시도 불편해지니까. 그런데 이 단순한 논리를 트럼프는 몰러유. 그리고 나대지요. 그래 미국의 많은 이들이 ‘이상하다’하는거유. 그럼 이재명, 윤석열은 어떨까유? 지금은 좋거지유.
“美服患人指,高明逼神恶.” (미복환인지, 고명비신악) “비싼 옷은 질시를 사고, 잘난 척은 미움을 산다.” 물이 모든 웅덩이를 채우고 그제야 다시 흐르듯 물이 남의 더러움을 씻고 자신이 더러워진 채 다시 흐르듯 물이 낮고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닥을 채워 깊이를 알 수 없게 높아지듯 우리는 그리 물처럼 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만은 기억하길... “美服患人指,高明逼神恶.” (미복환인지, 고명비신악) 굳이 왜 잘나야 하는지.
배 부름이 있어야, 배 고픔이 있는 것이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선하더냐? 악을 알아야 비로소 선을 아는 것이다. 선해려는 것은 결국 악을 알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이다. 내 악을 알아야 내가 선해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내가 비로소 선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결국 선하려 하는 것은 이미 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추함을 알아야 고쳐서 예뻐질 수 있는 것이다. 감춰서 예뻐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노자가 옳다. “天下皆知美之为美,斯恶已;皆知善之为善,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부선이.) “천하가 안다. 아름다워지려는 것은 아름다움이 추하기 때문이며, 착해지려 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에 이 원칙은 예외가 없다.
에효 멍~. 기운이 없시유. 개도 할 말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참. 거 뭐라 해야 허나. 참 거시기 해유. 뭔 이야기유? 한국 정치 이야기지유. 뭔 얘기겄어유. 웃지못할 코메디지유. 콧 방귀나 뀌지유. 세상은 참 넓고 할 일도 많은 데, 한국 정치권 꼬라지를 보셔유. 매일 서로 헐뜯는데 시간을 보내지유. 매일 황당한 기록을 세우는 한국 국회여유. 현재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은 법안은 6개에 불과해유. 이마저도 여야 합의 처리가 아니지유. 해병대원 특검법과 방송4법, 민생위기특별법이 본회의 문턱을 넘어슈. 그냥 넘은 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밀어붙였구먼유. 그런데, 해병대원 특검법은 재표결 끝에 폐기됐고, 방송4법과 민생위기특별법도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유력해유. 이 누무 국회는 야당은 의석수를 무기로 역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해 무력화하는 행태가 특허여, 특허. 아주 ‘도돌이 국회’라고 불려유. 역사에 기록될겨. 도돌이 국회 이름도 참 잘 졌구먼유. 그런데 이러는 사이 우리 자영업자는 어쩌유. 당장 전세값을 오르고, 장사는 안돼 문을 닫는 자영업자 수가 역대 최대치여. 최대치. 이 누무 경제는 부익부 빈익빈
배 고픔과 마찬가지다. 배 부름이 있어야, 배 고품이 있는 것이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선하더냐? 악을 알아야 비로소 선을 아는 것이다. 선해려는 것은 결국 악을 알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이다. 내 악을 알아야 내가 선해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내가 비로소 선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결국 선하려 하는 것은 이미 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추함을 알아야 고쳐서 예뻐질 수 있는 것이다. 감춰서 예뻐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에 이 원칙은 예외가 없다. 노자에 있어, 도란 존재를 완성시키는 유일의 원칙이다. 유한의 존재도, 무한의 존재도, 모두 도의 품에 있는 것이다. 있음 유(有)과 없음 무(無) 둘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있고서 비로소 없을 수 있고, 없고서 비로소 있을 수 있으니, 진정한 존재란 없어지는 있음이요, 있어지는 없음이다. 배 고프냐? 이제 배 부를 수 있겠구나! 배 고품의 시작이 배 부름이요, 배 부름의 시작이 배 고품인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세상의 쉽고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다.
“배 고프냐? 이제 배부를 있겠구나.” 노자의 말이다. 무슨 말인가 싶다. 배 고프다는데, 그럼 이제 배부를 수 있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라. 배 부른 이가 어찌 배 부를 수 있겠는가? 배 고픈 이가 어찌 배 고플 수 있겠는가? 배가 부르려면, 먼저 배가 고파야 하고, 배가 고프려면, 먼저 배가 불러야 하는 법이다. 이제 생각하니 너무 당연한 말이다. 노자의 진리다. 세상의 쉽고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바로 노자의 진리들이다. 도덕경 2장의 이야기를 위한 몸풀기다.. “天下皆知美之为美,斯恶已;皆知善之为善,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부선이.) “천하가 안다. 아름다워지려는 것은 아름다움이 추하기 때문이며, 착해지려 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다.” 착해지려는 게 악해서 그렇다니? 마치 착해지려 애쓰지 말라는 소리로 들린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배 고픔과 배 부름을 생각하면 답이 있다.
자본을 쌓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게 '자린고비' 정신이다. 무엇이든 아껴서 모아야, 그게 쌓이면 자본이 되는 것이다. 굳이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재물을 쌓는 원리는 유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대학'에서도 나온다. '대학'은 나라가 부국이 되는 길을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生之者众,食之者寡“ (생지자중, 식지자과: 생산하는 이가 많고, 소비자가 적으면 재물이 쌓인다.) 하지만 재물의 도리는 버는 도리만 있는 게 아니다. 아끼는 것도 도리가 있다. 이 도리를 모르면 아끼는 게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요, 아낀다고 자본이 쌓이는 것이 아니다. 중국 옛 이야기는 배거(裴璩)라는 자리고비면서 악독한 관리가 나온다. 이 관리는 보기 좋은 가구만 보면 탐을 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매번 좋은 가구만 보면 사들였다. 하지만 한 번 산 가구는 아까워서 쓰지를 못했다. 매번 제대로 포장을 뜯지도 않았고 집 한귀퉁이에 쌓아 놓기만 했다. 그러다가 꼭 가구를 써야할 순간이 오면, 그 때는 어땠을까? 이 관리는 그래도 가구를 쓰지 못했다. 권력을 활용해 주변의 중고품을 빌려서 쓰곤 했다. 자신의 새 가구는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남이 쓰던 것을 쓴 것이다. 하지만 이 관료가 모르는